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동물원을 운영하다가 정치적 이유로 고국인 인도에서 사업이 힘들어짐을 느낀 파이의 아버지는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한다. 그렇게 주인공 파이의 가족은 동물원 사업을 정리하고 동물들과 함께 배에 올라 캐나다로 향한다. 늦은 밤 객실에서 잠을 자던 중 파이는 거센 바람소리를 듣고 갑판 위에서 바다 풍광이 보고 싶어 객실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태풍이라도 만난 것인지 배는 순식간에 침몰한다. 운 좋게 작은 구명보트에 홀로 올라탄 파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보트엔 몇몇 동물이 함께 타게 되는데 마지막엔 무시무시한 벵골 호랑이와 파이 둘만 남게 된다. 그렇게 세계라는 망망대해에 파이와 호랑이 단 둘만 남았다.
파이는 호랑이가 두렵다.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잘 수조차 없다. 천신만고 끝에 물고기를 낚아 올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호랑이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파이는 결국 호랑이를 길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배를 흔들어 멀미를 일으키고 호루라기 소리로 정신을 빼놓는다. 위압적인 눈빛과 먹이라는 보상으로 파이는 마침내 호랑이와 자신의 권력관계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공존을 하며 227일간 태평양 위를 떠돌다가 멕시코 인근 해변가에 다다르며 파이는 문명으로 돌아오게 되고 호랑이는 숲 속 어딘가로 사라진다.
파이가 사고 조사원들에게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는 파이에겐 사실이지만 조사원들에겐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호랑이와 어떻게 227일간 작은 보트 위에서 공생할 수 있으며 식인섬을 비롯해 파이의 입에서 나오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바다의 풍광과 파이가 겪어온 일들이 두 조사원의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제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막무가내인 조사원들에게 파이는 체념한 듯, 실제로 일어날만한 일을 말해달라는 것이냐며 동물이 일절 나오지 않고 인간들이 주인공인 또 다른 227일간의 두 번째 버전의 대 서사시를 들려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사원들에겐 제법 그럴싸한, 일어났을법한, 비교적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파이에게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소설 파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 중 무엇이 진실인지 파이를 제외하고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상징과 결말에 대한 해석이 읽는 이로 하여금 달라지며 그것이 작가 얀 파텔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주제의식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파이가 조사원들에게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에서 파이는 파이로 등장한다. 하지만 두 번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첫 번째 이야기의 호랑이가 파이가 아니냐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호랑이가 실제 호랑이이거나 파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상징물일 수 있다는 것이 두 해석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정말로 그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작가는 독자가 이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어떤 해석을 하고 어떤 결말을 만들어내는지 더 궁금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진실된 이치'라는 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파이가 파이인지, 호랑이가 파이인지 모르겠지만 그 둘이 모두 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면 파이와 파이(호랑이)의 대결과 공생은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라고 볼 수도 있다. 파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자신과의 싸움이 갖는 의미는 그저 그런 대결, 적당한 극기, 나를 초월하기 위한 인내, 그런 고귀하고 이상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다. 그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사투, 이기거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잡아먹히고야 마는 공포, 그야말로 존재의 유지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나와 대결해야 한다. 본능과, 죄악과, 나태와, 공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내 안의 나, 자칫 한눈을 팔거나 잠이 들면 그런 나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파이는 처음에 그 두려운 또 다른 나(호랑이)를 회피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것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직감한다. 그렇다면 다스려야 한다. 때로는 먹이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타협일 수도 있다. 적당히 내 안의 욕망의 나체를 드러내고 충족시키는 행위, 어찌 보면 지혜로운 길들임이라 볼 수도 있다. 이는 적당히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이다. 내 안의 지배자(호랑이)는 배가 고파지는 즉시 나를 잡아먹으려 들 테고 그것은 내가 잡아먹히기 전까지 끊임없이 반복될 불안인 탓이다. 결국 파이는 호랑이를 다스리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제압이다. 내가 우위에 있음을 알린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조련하기 시작한다. 조련의 도구는 먹이와 규율이다. 리처드 파커가 내 안의 어떤 본능, 악이라면 그것을 다듬는 것은 적절히 욕망을 해소하고 규율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욕망을 외면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면 적절하게 통제하며 인생을 함께 가야 한다. 그렇게 파이는 두려운 나(호랑이)를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세계라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파이는 그제야 조금 평온해진다. 파이는 스스로를 구했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난 녀석을 보며 긴장했고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 내 안의 두려움, 공포, 혹은 어떤 악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자질을 알아차리고 돌보고 살피는 것, 삶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며 가장 마지막까지 놓지 않아야 할 인생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수행의 본질, 그것은 극기다. 유교의 극기복례, 불교의 팔정도, 기독교의 자기 부인, 이슬람의 지하드,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 여러 종교와 사상은 자신을 이겨내거나 부정하거나 통제하는 것에 큰 의의를 둔다. 저자 얀 파텔은 다양한 종교적 경험을 통해 이러한 공통점을 체득했는지 모른다.
파이는 육지에 도달해 리처드 파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삶이란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며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이는 고향을 떠났고,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었다. 세계라는 망망대해에서 완벽히 고립된 채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기 안의 두려움마저 극복해 냈지만 문명과 평화와 생존의 문턱인 육지에 다다르자 자신의 일부였던 어떤 것(리처드 파커)조차 잃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의 순간은 작별인사조차 할 겨를 없이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파이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작가는 첫 번째 버전의 호랑이 이야기를 믿고, 사고 조사원들은 두 번째 버전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믿는다. 둘 다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지만 각자 믿고 싶은 이야기를 믿는다. 작가에겐 호랑이 이야기가, 보험사 직원들에게는 현실적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실 따위는 상관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각자에게 더 매력적인 이야기, 도움이 되는 이야기, 그렇게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잡아끄는 이야기에 인간은 매료된다. 그러니까 얀 파텔이 파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자기와의 싸움, 끝없는 이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동물이 주인과 사귀기 위해 가장 끈질기게 노력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가장 충직하고 가장 필요한 동반자임을 증명해 보인다. 주인에게 도전하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75p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자들은 정작 나병에 걸려 동전푼을 동냥하는 과부는 못 본체 지나고, 누더기 차림으로 노숙하는 아이들 곁을 지나면서도 '늘 있는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점을 보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군다. 112p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247p
시간은 우리를 갈망하게 할 뿐인 환영인 것을. 내가 살아남은 것은 시간 개념 자체를 잊은 덕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사건과 만남, 일상, 시간의 바다 여기저기서 나타나서 기억에 발자국을 남긴 일들이다. 278p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433p
진여. 인간의 삶, 인류의 역사, 종교, 정치, 철학, 인간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그러하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거나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아에 갇혀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밖에 없는 주관적 존재이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경험이 쌓여 그 주관은 더욱 강해지니까. 그것이 이야기가 잉태되는 근본 원인이며 인간이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이니까.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살게 되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라보는 능력(진여)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실을 말하는 파이에게 보험사 직원들이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 말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을 때 파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들이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파이의 첫 번째 이야기가 파이에겐 무섭도록 잔인한 현실적 이야기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비현실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현실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계는 결국 각자의 자아에 의해 분할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희로애락이 얽히고설켜 반복되는 것, 그래서 극기를 넘어 결국 우리 각자가 스스로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때에야 극락에 이를 수 있는 것,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