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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16. 2020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할지라도

불량식품은 결코 식품이 될 수 없다.

무플보다 악플이 나아요


인기의 중심에서 조금 멀어졌거나 주류가 되지 못한 연예인들은 무플보다 악플이 차라리 낫다며 대중의 관심을 갈구한다. 대중의 관심이 곧, 그 연예인의 가치가 되는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을 때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대중으로부터 받는 관심이 인기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화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다시 말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연예인에게 대중의 관심이란  수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항상 대중의 관심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온한 무관심보다는 나를 태워 죽일지도 모를, 그것이 설령 늪과 같은 악플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그 독주를 마시고 말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생기고 만다.


선플과 악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무뎌짐과 자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학교에 있다 보면 관심을 끌기 위해 이상 행동을 보이아이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런 행동을 목격할 때면 얼마나 관심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으면 저렇게 해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애처롭게 그 아이를 들여다보게 된다. 들여다봐야지만 제대로 마음을 담은 관심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심을 받고 인정받고 싶은 본능이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애정과 관심의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한 이렇게 욕구는 가득한데 적절한 자극을 제공받지 못하거나 혹은 오랫동안 무자극 상태로 방치되어 버리면 그것의 반작용으로 부정적인 반응 일지라도 갈구하게 되는 이상 현상이 발현되곤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시골길을 지나다가 오랜만에 맡게 된 똥 냄새 때문이었다. 


다양한 냄새를 자주 맡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후각이 둔하다고 해야 할지, 어쩌다 맡게 된 냄새를 강렬하게 인식하여 그 냄새에 흠뻑 취하는 경우가 많아 후각이 예민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오는 냄새에 대하여 가만히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과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소똥 냄새가 나는 순간이면 어머니는 항상 고향의 냄새라며 즐거워했다. 이날은 내가 그랬. 어느 시골길을 운전하던 중 스멀스멀 콧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소똥 냄새를 마주하며 어릴 적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고향의 냄새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가끔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맡게 되는 이 정겨운 냄새는 나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기보다 코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후각적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 같아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우리의 일상 속는 사실 다양한 냄새가 존재할 터인데 일상이라는 눈가리개 때문일까? 냄새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코를 통해 훅 들어오는 어떤 강력한 냄새는 마치 오랜 기간 적절한 자극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가 나쁜 행동을 통해 관심을 받고 기뻐하는 것과 같이, 비록 그것이 똥 냄새라고 할지라도 얼마간의 기쁨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며칠을 굶은 뒤 먹게 되는 식사는 진수성찬이 따로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오랜만에 듣게 되는 빗소리는 메마른 감성을 자극하듯이 오랜만에 접하는 자극은 그만큼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


때에 따라서 우리는 이런 자극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도 있겠다. 두려운 자극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치료 방법으로 노출법이라는 기법이 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자주 제공하여 그런 종류의 자극에 무뎌지게 만드는 치료 요법이다. 이러한 사례를 보았을 때 두려운 자극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 작은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반대로 소중자극이라면 아껴 두어야 할 필요도 있겠다. 내가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극을 너무 자주 꺼내 마주하게 되면 그것의 기쁨을 전이 누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빈도의 조절을 통해 자극이 나에게 주는 충격을 극대화, 최소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나름 합리적인 해결책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쿵 저러쿵 해봐야 좋지 않은 자극을 섭취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좋은 결과를 기대할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똥 냄새가 코를 뚫어 준다고 해서 향기로운 것은 아니며 집착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입 안에 설탕을 통째로 털어 넣었다간 당뇨만 얻게 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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