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철은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비틀비틀 화장실이 있는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마담 역시 술을 더 가져 오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담은 이 와중에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술이며 안주를 나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를 뜨자 그제서야 경애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입을 삐죽거렸다.
“와하, 정말 엄청난 쇼였네, 그치? 저 허풍 좀 봐. 무슨 과대망상증에라도 걸렸나? 난 좀 무섭던데?”
하지만 현태는 딴생각에 빠져 술잔만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경애가 바짝 엉덩이를 붙이면서 속삭였다.
“요즘 바쁜가 봐?”
현태는 고개를 돌려 슬쩍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수철도 마담도 보이지 않았다.
“어어, 졸업식 시즌이라.”
“아, 그렇지.”
그녀는 아직 다 비우지도 않은 그의 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 주더니 얼른 속삭였다.
“그럼, 언제 만나, 우리?”
경애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어 그의 왼쪽 무릎을 슬쩍 꼬집었다. 현태는 다시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수철과 마담이 주방에서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내일 만날까?”
경애가 재빨리 속삭였다. 경애의 입에서는 양주와 땅콩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
현태가 대답하자 경애는 잇몸을 들어내며 비죽이 웃더니 인질을 놓아주듯 그의 무릎을 놓아 주었다. 세게 잡았던 것도 아닌데 현태는 한쪽 다리가 얼얼한 느낌이었다. 그 때 마담과 수철이 마른안주와 맥주를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현태는 그들이 접시를 탁자에 채 내려놓기도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그만 가봐야겠는데.”
“아니, 벌써? 왜?”
수철은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동시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가게 안에는 벽시계가 없었다. 손님들을 더 오래 잡아 두기 위해 마담이 일부러 걸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형 마트들이 자신에게서 이 비법을 훔쳐갔다고 우기곤 했다.) 시계는 12시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철은 손목시계를 검지 손톱 끝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에이, 더 있다가요, 형.”
“안 돼.”
현태는 벌써 손에 가방을 챙겨 들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더 있다 가요. 좀 오늘 만요. 딱 한 시간 만요. 예?”
수철이 덥석 현태의 팔을 잡았다. 그 손매가 거칠었기 때문에 현태는 수철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수철의 다급한 웃음 속에 사금파리 같이 묘한 껄끄러움이 섞여있는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무심히 밀쳐냈다.
“안 된다니까.”
현태가 딱 잘라 거절하자 수철은 턱을 한 번 으쓱하더니 손을 놓았다.
“근데 형도 참 별나. 36살이나 먹은 독신 남자가 꼭 자정 전에 꼬박꼬박 집에 들어간다니까. 자기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진짜 집에 우렁 각시 하나 숨겨 둔 거 아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얘기 했잖아. 12시에 맞춰서 먹어야 되는 약이 있다고.”
“아, 그 불면증 약? 몇 달을 먹어도 소용도 없는 걸, 뭐.”
“그래도 꾸준히 먹으라는데 어쩔 수 없잖아.”
현태는 몇 달 전에 얼떨결에 했던 거짓말을 무를 수가 없어서 계속 우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기대 이상으로 유용하기도 했다. 수철은 영 못마땅한지 뒷목을 긁어댔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더 있을 거야?”
“당연하죠. 술도 안주도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나는 원래 열두시부터 본격적으로 술이 받는 체질이야. 그러니까 갈 사람은 빨리 가요. 분위기 더 흐리지 말고.”
“그래, 그럼, 지금까지 먹은 건 내가 계산하고 갈게.”
“이야,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내가 꼭 한 턱 쏠게요. 조심해서 가요.”
수철은 다시 기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부러 호탕하게 웃었다. 양쪽의 여자들도 따라 웃었다. 현태는 서둘러 옷깃을 여미며 주황색의 소굴을 빠져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니 12시 14분이었다. 이 정도면 ‘세이프’인 셈이었다. 자신이 일분일초라도 늦으면 견디지 못하는 강박증환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현태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냉장고에서 우유 한잔을 꺼내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술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차디찬 우유로 입술을 적셨다. 봄이 멀지 않은지 밤공기에는 제법 온기가 섞여있었다. 그는 우유를 한 모금씩 삼키며 멀뚱히 회색빛 아스팔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쯤 되면 기분이 차분해져야 하는데 오늘따라 머릿속이 뒤숭숭했다. 술자리에서 수철이 했던 얘기들이 아직도 고약한 냄새처럼 코끝을 맴돌았다. 음모, 빚, 죄의식, 빈털터리, 돈, 존엄성... 실제로 지각 보다는 후각을 동원해야 하는 단어들.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현태는 별안간 들고 있던 유리컵을 창밖으로 훌쩍 내던졌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컵은 아스팔트 위에서 산산 조각으로 흩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