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 이야기와 전설
공연장소 :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
공연기간 : 2024년 11월 7일 ~ 2024년 11월 10일
관람시간 : 2024년 11월 10일 오후 3시
이 작품은 지루하다. 재미없다. 장황하다. 고루하다. 진부하다. 시시콜콜하다. 재치도 없고 상상력도 빈약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큼은 조곤조곤 차근차근 분명하게 말한다. 그래서 재미없고 고루하지만 진지한 사람과의 대화처럼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이 연극은 AI와 인간의 공존에 대해 다루고 있다. AI와 함께함으로써 달라지게 될 인간성의 경계, 관계의 형태, 그리고 삶의 전망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AI에 대한 분석과 예측과 몰입도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 '그녀'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하지만 그것을 크게 탓할 필요는 없다. AI에 대해 다루고 있는 척 하지만 사실 이 연극은 AI에게는 관심조차 없으니까. AI는 주제가 아닌 소재, 아니 더 나아가 밑밥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오히려 최근 논란의 중심이며 영감의 원천인 AI를 옆에 앉혀 두고도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인간만을, 오직 인간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천진난만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AI 혹은 AI 인간화 로봇이 일반화되면 과연 인간은 덜 인간적이 될까? 더 냉정해지고, 이성적이 되고, 계산적이 될까? AI가 인간과 인간관계를 대체하게 될까? AI가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AI가 될까? 우리는 심각하게 오염되거나 혹은 눈부시게 개선될까? 아니, 이 연극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혹여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인간은 그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 충만함 뿐만 아니라 결핍까지, 사랑뿐만 아니라 미움까지,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까지,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고스란히 짊어지고서 여전히 인간이며 지극히 인간이고 끝까지 인간일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상대가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곧바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감싸 안아버린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뒤집어지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마저 위협받을 때조차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협소하기 그지없는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그저 적응할 뿐이다. 자신의 불완전함마저 완전하게 사랑하는 괴이한 존재. 이 연극은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AI를 핑계 삼아 다시 한번 꼼꼼하고 집요하게 바라보고 싶어 한다. 마치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영원히 보고 있어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는 듯이. 아니, 심지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사실 이 연극에는 결정적인 비겁함, 본질적인 부족함이 있다. AI 로봇들을 의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연극의 AI 로봇은 인간이기보다는 자동기계인형에 가깝다. 그렇게 AI의 차가운 기계성을 인간의 뜨거운 인격과 대비시키고 있으며, AI에 대한 인간의 애착 역시 인간의 감상이 투영된 사물에 대한 왜곡된 애착 정도로 비하하고 있다. AI를 의인화된 기계로, 편리한 도구로, 일종의 청량제나 자극제로, 추억이나 애정을 이입하는 대상으로, 극복되어야 할 애착 이불로 격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AI가 이 정도 수준이었다면 문제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연극의 AI 담론은 지극히 단순하고 협소하며 편파적이다. 말하자면 이 연극의 AI 로봇이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기능이나 역할, 즉 본질일 뿐 결코 실존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 곤란해하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인간 실존에 대한 침범과 그 경계의 무력화인데 말이다. 이 연극에서 인간 실존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침해당할 수 없는 높은 성역이며 인간성은 그 성역 꼭대기에서 힘차게 나부끼는 총천연색의 깃발이다. 이것은 마치 할아버지의 까마득한 젊은 시절 얘기처럼 다정하고 순수하지만 완고하고 답답하다.
이 연극은 AI의 지극히 원시적인 모델을 기반으로 인간의 주체성, 고유성, 존엄성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AI는 결코 인간을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는, 혹은 대체해서는 안된다는 속삭임이 음파처럼 연극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일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은 대체될 수 없다는 믿음,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단지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믿음이 한결같은 소망이라는 것이, 이 지루한 연극을 오히려 놀랍고 신선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 연극은 거의 최후의 휴머니즘의 방어선쯤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