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주는 사연)
자그마한 비탈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게 바라보며 느닷없이 동부콩을 아느냐 한다.
지난주에도 만났던 이웃동네 아주머니다. 오래 전의 기억이 번뜩 떠 올랐다.
긴 제방에 넝쿨이 뻗어 주렁주렁 달려 있던 동부다.
추석이면 송편 속을 채워주던 고소하고도 맛깔난 콩이다. 밥에 넣어 먹으면 구수함에 가을을 알려주는 맛있고, 어머님이 사랑했던 동부콩을 잊을 수 있을까? 아주머니는 영근 동부를 따며 밥에 놓아 먹으란다.
몇 개 남겼다가 내년에 심어 보라며 바쁜 몸놀림이다.
아침 자전거를 타고 나선 시골길에서 만난 아주머니이다. 안개가 뿌연 새벽이지만 농부들의 발길은 바쁘다. 논에 물을 살피고 고추밭을 돌아보는 농부들은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무자비하게 더운 날씨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어어서다. 자전거를 타고 나서지만 늘 부담스럽다.
어르신들이 일을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얼쩡거리기가 죄송하다. 오늘도 마을을 피해 들어선 산길이다. 일하시는 어르신들을 피하며 자전거를 타기 위함이다. 산 옆에 붙어 있는 밭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와 만난 것이다. 지난주에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흔일곱이 되었다는 아주머니, 누님뻘이 되는 연세다.
시골에서 살아 온 몸은 노인임을 금방 알려준다. 햇볕에 그슬러 검은 얼굴에 등이 굽어 있는 아주머니, 지난주엔 블루베리를 한 움큼 따주며 먹어보라 하셨다. 약간 씁쓸하지만 먹을만하단다. 눈에 좋다는 블루베리라며 한 주먹을 더 따 주신다. 오늘은 동부를 따면서 연신 이야기를 꺼내신다.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누워 있고 본인이 대신 농사를 짓는단다.
아들은 오십에 가깝지만 대처에서 일을 한다는 아주머니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자기 집이란다.
연신 동부를 따면서 건네준다. 이만해도 충분하다 해도 멈추질 않는다.
그까짓 거로 뭐 하느냐며 익은 동부를 찾아다니는 아주머니는 오래 전의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일을 하시는 아버지 옆에 늘 붙어 다니셨다. 동부를 따고 고추밭을 매며 고구마를 캐고 깨를 터셨다.
어떻게 저리도 쉼이 없는 삶일까를 늘 궁금해하던 어머니였다.
일흔일곱에 돌아가셨으니 아주머니의 연세였다. 쉼이 없이 식구들에게 주기만 하셨던 어머니다.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웃 동네에서 만난 것이다.
한참을 따 모으신 동부콩은 검은 봉지에 가득이다. 많은 동부를 어찌할 줄을 모르자, 밥에 넣어 먹으면 구수하고도 밥맛이 좋다 하신다. 몇 꼭지 두었다가 내년에 심어 보라 하신다. 어렵게 농사지은 동부콩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서 주시는 아주머니, 시골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었다.
모르는 이웃에게 블루베리를 따주고, 동부콩을 한 봉지 건네준다. 고마움에 인사를 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 하자 소독약이 든 통을 메고 나선다. 고추에 병이 나서 약을 해야 한단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소독약 통이 메어져 있다. 굽은 허리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안쓰럽다. 어렵게 지어 놓은 고추라 얼른 소독을 해야 한단다.
시골 사는 사람들의 삶, 오래 전의 내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려워도 말이 없었고 힘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콩을 털고 깨를 털어야 했으며 온갖 밭일을 도맡아 하시던 어머님이셨다. 얼른 자리를 떠난 것은 힘겹게 일을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서다. 도와줄 수도 없는 처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오래전 나와 같은 아들은 대처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파 누워있어도 농사를 그만둘 수 없다. 300평이나 된다는 밭일을 어렵게 하시는 아주머니다. 어떻게 해온 고추인데 병이 난 것을 그냥 지날 수 있을까? 어렵게 힘을 내서 소독을 해야 한다. 김장을 해야 하고, 가용돈을 마련해야 하는 고추밭이다.
서둘러 달려가는 들판엔 가을빛이 역력하다. 누렇게 익어가는 볏논이 탐스럽고, 고개 숙인 수수가 보기 좋다. 온 밭을 온전히 메운 옥수수는 넉넉히 익어가고 있다. 지나는 길손에 놀란 뜸부기가 하늘 속으로 날아든다. 가을이 넉넉히 익어가는 들녘에 힘든 아주머니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대처에서 살아가는 자식들과 병든 남편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느라 내 몸 돌볼 여유가 없다.
세월이 알려준 내 어머님의 삶에 마음이 찡해온다. 아주머니 뒷모습에 그예 눈가를 적시고 말았다.
맑은 햇살이 떠오른 들판은 기어이 가을이 오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