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은 그렇게 오나 봅니다.

(가을 안개가 주는 풍경)

by 바람마냥

새벽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넘어온다. 순간, 춥다는 생각보단 서늘한 상쾌함이다. 아, 이젠 가을이 다 왔구나! 창문 너머에 뿌연 안개가 앞 산을 덮었다. 가을이면 그려지는 앞산의 풍경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거미들의 삶이다. 거미들의 삶의 터전에 하얀 이슬이 내린 것이다. 와, 어떻게 저런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날마다 만나지만 언제나 감탄부터 나오는 풍경이다. 그렇다. 가을은 우리 곁으로 깊숙이 와 있다.


몇 해 전에 심었던 하얀 구절초도 꽃을 피웠다. 해마다 자잘한 꽃만 펴 애를 태웠는데, 올해는 그럴듯한 하양으로 잔디밭 가장자리를 메꾸었다. 아, 이렇게 맑은 하양도 있구나! 여기에 이슬에 내려앉았으니 햇살만 찾아오면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림이다.

잔디밭에도 거미들의 수고는 지나치지 않았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삶의 그림자를 적당한 크기로 걸어 놓았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설치예술을 뛰어넘는 절절함이다. 삶의 처절함이 주는 거미의 일상 모습이다. 가을을 알려주는 것은 또 있다.

IMG_3399[1].JPG 앞산을 하얗게 수 놓은 가을의 결실

초봄, 연초록의 새싹이 나와 여름의 진초록으로 물들였던 화살나무다. 진초록이 어느새 붉음으로 물들었다. 야, 올해도 이렇게 끝을 향해 가는구나! 화살나무를 보고 맞이하는 가을이다.

무심한 세월을 남겨놓고 저만 붉음으로 치장함이 서럽기도 하다. 어떻게 한 해도 거름이 없이 붉음을 쏟아 놓는단 말인가! 가을을 알려주는 진빨강의 코스모스가 서럽더니 화살나무도 야속했다. 언제나 진초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체육관 너머엔 오래된 벚나무가 여러 그루다. 운동을 하며 찾아간 눈엔 어느새 단풍이 머물렀다. 야, 올해도 다 가고 있네! 하얀 구절초에, 붉은 화살나무를 보며 지난 가을을 추억해 본다. 앞산에는 여전히 뿌연 안개가 가득이다. 대관령이 이사를 왔고, 한계령이 넘어왔다.

분위기 파악도 못한 이웃닭이 길게 목을 늘인다. 늦잠이라도 있었으면 옅은 가을 속에 더 머물 텐데. 언제나 쓸데없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뜨리는 이웃닭이다. 시선은 얼른 먼 산으로 찾아갔다.


옅은 바람 따라 일렁이는 안개는 앞산을 부분만 보여준다. 한쪽을 감추었다 보여주고, 반대를 보여주다 얼른 감춘다. 숨바꼭질을 하는 안개와 앞산이다. 오래 전의 기억이다. 네팔의 포카라 사랑콧 전망대, 새벽에 찾아갔던 기억이다.

떠오르는 햇살에 따라 번차로 보여주던 히말라야의 봉우리들, 숨이 멎어 얼어붙었다. 저런 풍경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두고두고 떠오르는 명장면을 연상케 한다. 서서히 시선을 앞산으로 당겨보면 여기에도 가을은 넉넉하다.


뿌연 안갯속에 진한 하양이 망울망울하다. 저것이 무엇일까? 여기엔 개망초가 있고 붉은 서나물 그리고 지칭개와 엉겅퀴가 살았다. 가끔 내려오는 고라니의 놀이터다. 앞산의 온 식물들이 가을을 준비했다. 하양 씨앗을 만들어 허공에 흩뿌렸다.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부단한 노력, 식물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뿌연 안갯속에 하얀 솜털이 숨어 있다. 햇살이 돋아나면 이슬을 털어내고 앞산을 수놓을 것이다. 서서히 앞산의 미끄러져 내려오면 여긴, 동네의 숨은 보석 도랑물이 옹알거린다. 잔잔한 가을비가 주고 간 선물, 맑은 물과 말간 물소리다.


가을을 알려주는 고마니풀, 붉은 꽃을 달고 도랑을 덮었다. 여인의 품처럼 푸근함을 도랑을 한껏 껴안았다. 고마니 풀 속을 헤치고 흘러가는 도랑물은 어디고 가고 있을까? 돌이 있으면 피하고, 낙엽이 있으면 싣고 간다. 갖가지 식물에 생명수가 되어 주고 또 주며 넉넉하게 흘러간다. 계절이 주고 간 넉넉한 이 가을이 주는 골짜기의 풍경들이다. 벼가 익어가고 수수가 영글어간다. 가을배추가 푸르러가고 메뚜기는 신이 났다.


서서히 햇살이 넘어오며 뿌연 안개의 속마음이 보인다. 그 속엔 세월이 있고 세상이 있었으며, 잠시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던 상상이었다. 야, 뿌연 안개가 벗어지니 이런 세상이 또 펼쳐지는구나! 하얀 햇살이 찾아 온 세상은 또 다른 가을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코스모스가 출렁이고, 하얀 구절초가 웃고 있다.

맑은 하양을 가득 실은 구절초, 여기에 달빛이 찾아오면 그만인 그림이다. 맑은 하양에 내린 그냥 하양 달빛은 대단했다.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추석을 찾아가는 골짜기의 가을, 여기엔 하얀 달빛과 구절초 그리고 가슴에 가둬둔 가을이 한데 어우러지는 아침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