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에 솜을 이고 가던 당나귀 이야기가 있다. 물에 빠져 솜이 젖자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흔히들 ‘꾀를 부린 탓’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당나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짐 나르기가 두려웠던 건 아닐까. 현대의 언어로 치면, 사회공포증 같은 것이 그에게 있었던 건 아닐까. ‘유학’이라는 단어는 내게 그 젖어가는 솜과도 같았다. 처음엔 폭신폭신하고 가벼워 보였지만, 현실에 부딪힐수록 무게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오래 준비한 걸 막연한 불안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불안이 불쑥 얼굴을 내밀 때마다 나는 반려견과 산책을 나갔다. ‘지금, 여기’를 알려주는 존재 덕분에 불안과 막막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설령 그 끝에 ‘유학 포기’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항상 ‘끝에 가서 포기’를 염두에 두는 걸까. 예전에 엄마도 내게 말했다.
“넌 뭔가에 마침표를 찍을 때, 늘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더라.”
그랬지.
그럼 난 이번에도 독일 유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 불안이 끝날까? 내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솜털을 보면서 지나온 학업경력을 되돌아봤다. 예상외로 학업만큼은 달랐다. 두렵고 힘들어도 언제나 붙잡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나 생각할 때 내 무릎 위에서 한숨을 푹 쉬며 낮잠 잘 준비를 하는 솜털을 보며 깨달았다. 돌아보면 늘 도와주는 이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사 때 지도교수님과 2주마다 한 번씩 논문미팅을 했다. 그 자리는 논문을 평가받는 자리였고, 나는 그런 평가 자리가 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답답했었다. 보통 답답하고 끝나는 수준이 아니었다. 2주마다 한 번씩 있는 논문지도 모임 때문에 모든 시간이 불안이었다. 어느 날 석사 지도교수님이 나를 불러 말했다.
"한 번은 네가 내 피드백을 반영하지 않아서 나를 무시하는 건가 싶었어. 그런데 내가 지켜본 넌 그런 애가 아니야. 혹시 무슨 일 있니? 그리고 너무 어려우면 상담을 좀 받아 보는 건 어때? 너 2주마다 살이 빠지고 찌기를 반복하는 건 알고 있니."
상담 결과, 나는 평가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안고 있었다. 상담을 오래 이어가진 않았지만, 내 상태를 돌아보니 분명 ‘수행 불안’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이어갈 때, 그 불안은 다시 나를 휘감았다. 사회공포증이라는 괜찮은 변명거리 뒤에 숨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때 친구가 물었다.
네가 사회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뭐가 달라져?
그러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게 뭐 대수냐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무렵, 학교 장학금으로 독일에 한 달 머물 기회가 있었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집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외에서 ‘집 같다’는 감각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2년 뒤 다시 독일을 찾았을 때도 그 감각은 여전했다. “한 번쯤은 이 땅에 뿌리를 내려보고 싶다”는 꿈이 선명해졌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느끼는 정(情)과는 다른 느낌을 가진 정(情)이었다. 한국에서 느끼는 정(情)은 정서적인 지지에 가깝다면, 독일에서 느끼는 정(情)은 좀 더 현실적인 도움에 가까웠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내 길이 확장되는 걸 체감했고, 친구들과의 인맥도 넓어졌다. 무심한 듯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내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던 분이 갑자기 오더니, 내가 인터뷰할 만한 곳을 소개해주었다. 어떤 이는 내가 방문하고자 하는 기관에 직접 메일을 보내주기도 했다.
최애 드라마 중 하나 <히어로는 아닙니다>에서 복만흠은 꿈으로 미래를 본다. 꿈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단편적이고 모호하다. 그 단편적이고 모호한 꿈으로 언제나 불안은 예측했다. 그녀에게는 과거로 들아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들 복귀주가 있다. 복귀주는 과거에서 희망을 찾아다녔다. 정보도 보장도 없는 희망이지만, 결국 현재에 도착하는 건 언제나 희망이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과거에 묶여 있지 않고, 미래에 막히지만 않는다면, 현재에는 늘 희망이 있다고. 전래동화 속 당나귀 결말이 좌절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당나귀는 현재를 직시하지 않고 꾀를 부리다 삐끗했다. 괜찮다. 목화솜을 햇볕에 잘 말린 뒤, 결국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했다. 다행히 그 불안은 햇볕만 조금 쬐면 금세 가벼워질 목화솜일지 모른다. 불안과 막막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그것을 대하는 태도, 목화솜을 햇볕에 말리려는 태도이다. 그 태도가 희망이라는 현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