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는 우리
이 글을 기획한 건 한참 전이었다. 우리 큰 딸이 올해 9월 만 10세 생일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수개월 전부터, 우리 큰 딸의 생일을 계기로 엄마, 아빠 그리고 시부모님과 함께 세 아이를 알토란같이 키워온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고 싶은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를 위해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따로 모아 두기도 하고, 특별했던 순간들을 미리 머릿속에 정리를 해두며 나름 행복한 사전작업들을 해두고 있었던 것 같다. 내년 초에는 온 가족이 말레이시아로 골프 여행을 간다는 원대한 계획도 세워두었다.
성취적 측면에서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찬란할 수는 없었다. 나는 국내의 굴지 건설회사에서 7년간의 사내변호사 생활을 마치고, 국내 대형 로펌에 입사했고 나의 입사 이후 새로운 팀이 생겨서, 그 팀에서 새로운 일들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때로는 힘들 때도 지칠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서포트와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성장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담당했던 거의 모든 사건에서 승소를 했고, 거액의 장기 자문계약도 이어가고 있으며, 운 좋게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시간이 누구에게나 행복한 10년이었을까. 우리 엄마가 첫째를 부탁드렸을 때, 주변 지인들이 절대로 아이를 봐주면 안 된다면서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다 도와줘도 절대 애는 봐주지 말라고. 몸 다 상한다고."들으셨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님은 아파트 아래층에 전세를 얻어 쳐들어오는 나의 기세를 꺾지 못하셨고, 매일같이 싱싱한 열매처럼 발그레 이뻐지는 우리 딸들과 아들을 보며 함께 웃으며 10년을 보내셨다. 우리는 함께 테니스를 보러 가고, 골프를 치며, 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다니며, 목욕탕도 가고, 아이들의 피아노 콩쿠르를 보러 가며,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자축했고,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옹기종기 모여 걱정을 하면서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그 사이 우리 아빠는 동네에서 아이들 손잡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니시는 할아버지로 명성이 자자해지시기도 했다.
인생은 사는 것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에 예상치 못한 낯선 바람을 몰고 온다. 내가 이 완벽한 생활 속에서 조금 더, 한 발짝 더 성공의 길로 나아가고자 바둥거리며 승진과 해외근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손을 뻗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테니스도 치시고 동네 분들과 회식(?)도 잦으셨던 아버지께서 신장암 진단을 받으신 것이다. 나도 이제야 공부하고 알게 된 거지만 신장암은 조용한 암이기에 원래 증상이 별로 없고, 건강검진 등을 통하여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착한 암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아빠의 경우, 어느새 암이 적지 않게 진행되었고, 혈관을 타고 심장에 임박하기에 이르러 매우 고난도의 어려운 수술만이 살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가장 놀랐을 아빠 앞에서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동안 크나큰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딸들이 아빠에게 반항하거나, 15kg가 넘는 막내가 아빠에게 안아달라고 했던 모든 순간 등이 떠오르며, 아빠가 우리 애들을 봐주시느라 아프게 된 것 같이 느꼈다. 그 고통이 깊어서 나는 주체할 수 없었고, 새벽마다 교회를 찾았다. 울고, 아빠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는 마음이 저 깊은 수렁으로 떨어져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의 각 장소에서 환하게 웃음 짓고 돌아다니시던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에 무한 재생되었다. 아빠는 테니스복에 테니스가방을 메고 테니스 한 게임을 하시고 집 쪽으로 줄곧 걸어오시곤 했고, 우리 막내아들과 함께 상가 앞에서 퇴근하는 나를 자주 기다리기도 하셨으며,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놀리시기도 하고, 깨끗한 성격에 본인 집과 우리 집 쓰레기까지 다 모이 분리수거를 하시느라 분리수거장에서 자주 목격이 되곤 했다. 소아과며 아이들 학원이며 줄곧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시던 아빠의 차는 아빠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 차를 볼 때마다 도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아빠가 그 모든 걸 하면서 아픈 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그야말로 나쁜 딸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새벽기도로 놀란 마음을 달래며, 아빠 곁에서는 최대한 밝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짧은 몇 주 동안 맨발 걷기도 가고, 가평의 키즈풀빌라에도, 서해안 갯벌에도 다녀왔다. 별다른 증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아빠를 보면 세상 마음이 평안해지다가도, 잠시라도 아빠를 못 보면 인터넷에서 찾아본 병세의 엄중함에 극도로 불안했다. 그리고 이제 내일 대망의 수술을 앞두고 계신다. 4시간에서 8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는 수술, 결국 개복을 해봐야 수술 방향이 잡힌다는 수술, 치료 수술이 아니라고 구제 수술일 뿐이라고 의료진이 강조하는, 도대체 동의를 하지 않는 옵션이라는 것이 있는 건지 궁금한 그런 수술을 나의 사랑하는 아빠가 받아야 한다. 이 와중에 나는 황혼육아 10주년 백서를 쓸 틈을 찾기가 어려웠고 어느덧 첫째 딸의 생일도 한 달 넘게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려움과 평안함이 뒤섞인 이름 모를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업무회의를 취소하고 급하게 컴퓨터를 열었다.
먼저 발병사실을 안 이후로부터 나와, 우리 남편, 그리고 언니네 가족, 엄마 아빠까지 똘똘 뭉쳐서 대응해 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내가 엄마아빠에게 안겨드린 황혼육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웃는 것이 불가할 정도로 많은 날들을 웃으며 보냈고, 부모님은 두 분만 지내셨더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경험들을 하셨고, 나는 부모님이 60세에서 70세를 향해가는 모든 순간을 목격했다. 또한 아빠의 발병사실도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에 알자마자 이어지는 검사와 진단, 수술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머리를 맞대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아빠가 무려 손주 6명을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돌본 세월 덕분인지, 우리 가족은 한 명도 빠짐없이 아빠를 걱정했고, 아빠를 위해서는 뭐든 일이든 하겠다는 각오로 한 마음을 모았다.
우리 남편이 아빠의 병세를 걱정하기에 내가 했던 말이 있다. 내가 "여보, 아빠가 편찮으셔서 여보가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쓰게 되네요. 고맙고 미안해요."라고 말을 했었는데, 이 말에 대한 남편의 대답이 지난 황혼육아 10년에 대한 답변처럼 느껴졌다. 우리 남편은 "아버님께서 우리 아이들 다 돌봐주셨고, 위 아랫집 살면서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내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분인데, 아버지와 다를 게 없지요. 당연히 내가 신경 쓰고 도움드리는 게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우리 시어머님도 주변에 우리 아빠 기도를 부탁하실 때면 "그냥 사돈이 아닙니다. 우리 손주들 다 키워주시고 돌봐주신 우리 진짜 가족이에요"라는 말을 꼭 덧붙이신다고 했다.
또 황혼육아에는 내가 생각했던 조금은 이기적인 장점이 있었다. 부모님께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는 장점도 있지만, 내가 우리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상황은 어느 날 오랜만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는데 노쇄한 부모님의 모습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느덧 70의 언덕을 넘어가고 계시지만, 나는 60세의 부모님도, 61세의 부모님도, 65세의 부모님도, 70세의 부모님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지켜드리고 기억하고 싶다.
마흔 넘은 딸이 아빠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니 조금은 웃기지 않은가. 하지만 독립적이던 둘째 딸의 이렇게 완벽한 의존성은 지난 10년간의 황혼육아의 산물이다. 엄마아빠와 우리 부부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10년을 굴러오다 보니, 아빠는 이제 내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효심이 아니라, 아빠는 실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중 한 명이 되었다(아빠 외에는 남편, 아들 정도밖에 없다).
아빠가 내일 길고 위험한 수술을 잘 견뎌내신다는 의학적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나가 있다. 힘든 수술 전에도, 수술 중에도, 수술 이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아빠 옆에 있을 것이다. 그저 미성숙한 어른이어서 아빠에게 의존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아빠가 지난 10년간, 어쩌면 훨씬 더 전부터 쏟아부어준 사랑을 먹고 지금까지 단단하게 자라고 견뎌온 나이기에, 이제는 나의 사랑과 기도, 그리고 지지를 통해 아빠가 꼭 나아서 이후의 황혼육아를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주시기를 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오늘 내가 아빠를 더 사랑하게 된 것처럼, 내일은 오늘보다 더 큰 사랑을 드릴 거기 때문에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이 될 우리의 황혼육아를 기대하면서 부디 아빠가 지금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꾹 참고 견뎌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