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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예민충입니다

토드 로즈 - <집단 착각>

by 알뜰살뜰 구구샘

나는 뚜벅이다. 내 직장까지 가는 시내버스 노선은 딱 하나다. 배차 간격은 무려 1시간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결국 나는 버스 기사님 얼굴을 다 외웠다.


기사님들의 유형은 다양했다.

1. 내가 인사하면 받아주는 기사님

2. 내가 인사해도 무시하는 기사님

3. 인사는 둘째치고 난폭운전 마스터하신 기사님


우리 동네 시내버스는 난폭운전으로 유명하다. 당장 유튜브에 '진주 시내버스 사고'라고 검색해 보라. 무시무시한 영상이 한가득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엔 고3 학생이 전신마비가 된 적도 있다. 당시 버스 앞으로 다른 차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버스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학생이 버스 끝에서 끝까지 날아갔다. 학생은 하필 목을 딱딱한 모서리에 부딪혔다. 그리고 전신마비가 되었다.


나도 초등교사로서, 딸 가진 아빠로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버스회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요금통 모서리에 스펀지라도 대 달라고 했다. 역시나 버스회사의 답은 한결같았다. 시청에 문의하란다. 그래서 국민신문고로 시청에 문의했다. 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버스회사에 문의하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난 끈질긴 놈이니까. 일단 증거부터 남기기로 했다. '난폭운전'이라는 건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맵 내비게이션을 켰다.


티맵은 운전점수라는 걸 제공한다. 이걸로 일정 점수를 넘기면 자동차보험료 할인도 된다. 보통 운전자들은 80점은 쉽게 넘길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시내버스 기사님의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30점대였다! 영광스러운 기록은 급가속과 급출발을 반복한 덕분에 달성할 수 있었다.


시내버스는 정류장이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그래서 교차검증을 했다. 다른 동네 시내버스 점수를 돌려본 거다. 수도권, 광역시, 옆 동네 창원 점수를 전부 모아봤다. 역시 우리 동네 기사님 점수가 짱이었다. 30점이라는 기록은 아무나 달성하는 게 아니었다.


자, 이제 난폭운전 기사님과 담판을 지을 차례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나, 예민충이면 어떡하지?'


결전의 날, 버스 안엔 승객이 많았다. 그들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님이 신호위반을 해도, 꼬리를 물어도, 앞차에게 욕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버스 안에서 열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만일 내가 기사님과 담판을 벌인다면? 그런데 나만 예민충이라면?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바로 영상으로 박제될 수도 있다. 잘하면 8시 뉴스에 얼굴을 알릴 수도 있겠지? 여기서 불편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은데, 그냥 참을까? 아니야, 나라도 나서야 해!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만들 순 없어! 난 이 꽉 깨물고 기사님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기요, 기사님"


기사님이 날 쳐다봤다.

기사님 뒤에 앉아있던 승객도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내 뒤에 있던 모든 승객이 날 쳐다봤다.

나는 용기 내서 말을 이어갔다.


"운전을 조금만 부드럽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버스는 분명 달리고 있었는데,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요 기사님! 아까부터 왜 자꾸 빵빵거립니까? 무서워 죽겠네!"

"나 이 버스 탈 때마다 느꼈는데, 기사님 안전 운전 좀 하이소!"

"거기 아저씨, 말 한 번 잘했소! 속이 다 시원하네!"


충격이었다. 버스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사님께 한 마디씩 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던 거다. 여긴 난폭운전 버스라는 사실을. 그리고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다. 안전하고 싶다고 말이다. 마침내 난 깨달았다. 나는 예민충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나는 어쩌다 용기를 낸 걸까? 그건 바로 이 책, 토드 로즈의 <집단 착각> 덕분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꾸준히 말했다. 용기 내라고. 소리쳐 보라고. 그러면 침묵하고 있던 사람들이 힘을 보태줄 거라고 했다. 사실 이건 고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꼬마 아이가 빵 터지고 나니까 온 백성이 함께 웃었지 않았는가.


다시 한번 이 책의 제목을 살펴봤다. <집단 착각>이란다.

내 방식대로 책 제목을 좀 바꿔봐야겠다.


1. '집단 침묵'으로 인해

2. 모두들 불편한 게 없다고 '집단 착각'하지만

3. 누군가 한 명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 '집단 함성'으로 바뀌며 더 나은 세상이 된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집단 침묵> , <집단 착각>, 그리고 <집단 함성>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참, 그 기사님은 어떻게 됐냐고?

그건.. 독자들께 열린 결말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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