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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기다림

뽑는 거다. 뽑는 거다.

by 아빠 민구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다. 이유는 많지만 결국엔 도파민에 절어버린 뇌가 더 이상의 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섬과 동시에 마치 관우가 적진에 뛰어들 듯, 자비 없이 집안일들을 베어낸다. 신발장부터 장난감, 세탁물을 정리하고 나면 이미 방전상태 경보가 울린다.


대략 이 정도 타이밍이 아내가 저녁식사를 차리는 시간이다. 저녁을 차리느라, 전기를 아끼느라 후끈 달아오른 집에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켠다. 아이들이 숟가락을 놓는 3-5분 사이에 나는 샤워를 마치고 풀어진 저녁시간에 녹아든다. 이제는 정말 저녁이다.


실랑이 끝에 6명의 식사가 끝나면 치우는 일이 남는다. 나와 아내 중 체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는 사람이 주방을 마무리한다. 이제는 정말 끝인가 싶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바닥에 벌러덩 눕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아이고-' 곡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며 바닥에 몸을 던진다.


내 위로 아이들이 올라타고, 끊임없는 질문과 책을 읽어달라는 요구와 각종 소음과 고민과 걱정과 하지 못한 일과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채워나간다. 그 위로 한숨을 내뱉고 아이들과 약간의 놀이 시간을 갖는다. 장기도 두고, 책도 읽고, 팔씨름도 하고 그러다 이 닦으라고 닦달도 하며 하루의 끝을 바라본다.


아까 켠 에어컨이 이제는 좀 시원해진 저녁 10시쯤 되면 이제는 살아남은 게 용한 시점이다. 이대로 자기엔 아깝고, 버티기엔 몸이 천근만근이. 책상 위의 연필꽂이를 바라본다.


펜은 거기에서 매일같이 나를 기다린다. 그날의 특별한 쓰임이 없어도, 뽑히지 못한 엑스칼리버처럼 그 자리에서 자신을 뽑아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를 쳐다본다. 말은 없다. 하지만 분명 나를 보는 게 확실하다. 펜은 거기서 기다린다.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책상으로 기어올라 아이들이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도 치우고, 뒤죽박죽 퍼즐도 치우고, 알록덜룩 색칠공부도 치우고, 레고 조각도 치우면 드디어 펜에 손을 델 수 있다. 이젠 뽑는 거다. 고작 몇십 그람짜리 펜이다. 못 뽑을 리 없다.


뽑는 거다. 뽑는 거다.


역시 엑스칼리버는 아무나 뽑을 수 없는 거다. 하염없이 기다린 펜을 뽑아 책을 펼쳐드는 게 왜 이리도 힘든지, 오늘도 쇼츠 몇 개 보다 꾸벅꾸벅 졸다 하루가 끝나간다. 매일의 반복이다. 오늘도 실패의 무력감에 쫓겨 죄책감으로 잠을 청한다. 분명 내일이 더 중요할 테니 지금은 자야 한다.


펜은 매일 기다린다. 언젠가, 정확하게 퇴근해서 집안일과 아이들의 요구를 처리하고, 무사히 자리에 앉아, 도파민으로부터 탈출하여 펜을 뽑을 그날을. 그날을 오늘도 펜은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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