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자전거 여행, 제주의 길 위에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이 말한 ‘길’처럼, 제주에도 길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실핏줄처럼 섬 곳곳으로 뻗어있다.
평화로와 번영로처럼 대동맥이 되는 큰길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고 있고, 5.16도로와 1100도로는 한라산을 에워싸 굽이쳐 있으며, 산록도로는 중산간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애조로(애월~조천)와 남조로(남원~조천)처럼 읍내 이름을 딴 길들이 7개 읍, 5개 면을 끈끈하게 잇기도 하며, 일주동로와 일주서로처럼 바다를 면해 제주를 휘감은 길도 있다.
실핏줄처럼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작은 길들 역시 올올이 퍼져 제주 섬을 살아 운동력 있게 만들어 준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을 감명 깊게 읽었다.
문장의 여운에 도취 된 나는 소년기 촉감을 일깨워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다.
작았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려서, 제주 섬을 일주하겠다는 약간의 무모한 ‘버킷리스트’를 일기장에 반듯반듯 적어 버린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은 나라가 인증한 ‘국토종주자전거길’ 중 하나로 제주도 해안도로와 일주도로 234km를 이어 자전거로 제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조성했는데, 많은 사람이 이삼일 간 이 길을 따라 풍륜의 노를 저어간다.
순풍이 등을 떠밀어 수월하게 저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역풍을 뚫고 힘겹게 나아가기도 하는 자전거 여행자들이 오늘도 제주도 곳곳을 누비고 있는데, 나 역시 자전거로 제주를 달려보고 싶다.
자전거 가게에서 클래식한 자전거를 샀다.
무겁고 기어도 신통치 않아 잘 달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과 빈티지한 디자인에 끌렸다.
자전거 타기 좋은 날, 아침. 간단한 짐을 꾸려 짐받이에 묶고 동쪽 함덕해변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 일주를 시작한다.
이왕이면 이틀 안에 제주를 한 바퀴 돌고 싶다. 그래서 더 씩씩하게 나아갔다.
함덕 해수욕장에서 해안도로를 달려 조천과 관곶을 지나 제주 시내로 향해 난 길을 달린다.
기분과 달리 자전거가 매끄럽게 구르지 않아 살펴보니 얇은 타이어 튜브에 공기가 빠져 있다.
동부두 근처 자전거 가게에서 삼천원을 주고 바람을 빵빵하게 채웠다.
자전거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용두암과 도두항, 하귀와 구엄 돌염전을 지난다.
고내 포구 다다르기 전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포구에 자리한 ‘무인카페 산책’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점심밥은 애월을 지나 곽금 어디쯤에서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옛 속담처럼 김치찌개와 계란프라이 하나 담긴 백반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서쪽의 바다는 담백했다.
높게 드리운 구름이 하늘을 반쯤 가린 탓인지 말랑한 햇빛 아래 바람도 상냥히 불었다.
한림을 지났고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심어진 신창 해안도로를 달린다.
오후 한때 일과리에서 쉬었다.
돌의자에 앉아서 대정 앞바다에 돌고래 무리가 유영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때부터다.
고비가 찾아온 것이.
다리는 아프지 않았는데, 좁고 딱딱한 안장에 장시간 사타구니가 쓸린 모양이다.
안장에 앉으면 따끔하고 쓰라려서 페달을 밟을 수 없다.
짐에서 수건을 꺼내 안장에 대보기도 하고 다리를 한껏 벌려 어기적대면서 자전거를 굴렸다.
몰려온 피곤과 통증에 산방산 지난 언덕길에서 자전거를 끌어야 했다.
도로 옆 버스정류장 벤치에 퍼지듯 누웠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한 시간여 혼곤한 잠에 빠졌다.
민폐였지만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 되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에도 묵묵히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 깜깜하게 드리운 어둠을 갈라진 가로등 빛으로 쪼개며 예약해 놓은 서귀포 시내 게스트하우스까지 달렸다.
하루의 여정이 끝이 났다.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다음날 일어나니 온몸이 말짱하다.
다시, 이른 아침 든든히 아침밥을 먹고 페달을 밟아 위미와 남원, 표선까지 나아갔다.
신산리 해안도로를 지나면서 양어장 소장으로 일하는 친한 형님을 찾아가 달달한 커피 한잔을 대접받았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하고 종달리까지 달렸다.
제주 북쪽 바다를 만나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등을 밀어주는 고마운 바람이었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자전거의 전진을 막는 앞바람이라 힘들게 나아갔다.
하도리와 세화, 월정리와 김녕, 북촌을 거쳐 종착지인 함덕에서 장정의 끝을 마쳤다.
욕심대로 이틀간의 자전거 제주 종주를 했다.
자전거에서 내리자 팽팽한 다리근육은 땅을 차오를 것 같이 당겨졌다.
곤두선 신경이 잠잠해지기까지 며칠이 걸릴까?
다시 일상이 시작되겠고 주말 특별한 여행을 마친 나도 다시 일상의 굴레를 밟아야겠지?
그래도 행복하다.
‘제주생활 버킷리스트’에 한 줄의 형광펜 덧줄을 그을 수 있었으니.
제주가 선사한 ‘평온’ 덕분에, 다시금 내 인생의 ‘리즈시절’이 찾아온 느낌이다.
그덕에 김훈 작가처럼 바람 따라 자전거의 돛을 펼칠 수 있었다.
자전거 바퀴를 굴려 나아갈 때, 비록 까맣고 주름진 중년의 가슴에 품은 감성일지라도,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수평선 같았던 사춘기 소년이 품었던 푸릇한 감성의 지경으로 넓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주에 살게 되면서 삶은 송두리째 변해 버렸다.
사계절 쏘다니며 온몸으로 맞았던 와랑와랑한 햇빛이 얼룩덜룩 기미가 오른 얼굴 전체를 고르고 까맣게 태워준 덕분에 건강해 보인다는 칭찬은 얼굴이 불콰해질 정도로 좋다.
그 결과 깊이 팬 주름 가득한 얼굴로 살게 되었지만, 어차피 늙을 인생, 무엇이 대수냐 싶은 마음으로 간세둥이(게으름뱅이)의 삶을 즐기련다.
더해 변한 것이 있다면, 들숨과 날숨으로 폐부를 들락거리는 상쾌한 제주의 공기 덕분에, 나는 점점 긍정의 생각이라는 넘치게 되었다는 것, 행복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주를 여행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