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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Oct 03. 2024

숨 고르기 할 시간

리루서점 일일책방지기의 어떤 하루



바람개비가 손 흔드는 철길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스치는 자리마다 반가운 풀잎의 몸짓. 선명히 들려오는 새의 목소리에 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딸깍’ 열린 줄도 모르게 열어진 오래된 자물쇠에 이끌려 나는 오늘 이 세계에 들어섰다. 일일책방지기의 이름으로 나는 그렇게 책방의 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바람이 지나갈 수 있게 앞뒤 문을 활짝 열었다. 플레이리스트에 오늘의 노래를 담고, 누군가에겐 유독 길었을 여름의 잔열을 식힐 적정 온도에 맞춰 에어컨을 켰다. 책방을 둘러보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하얀 셔츠를 입은 첫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학교숙제로 책방을 둘러보려는데 좀 오래 있어도 될까요?”


경기도에서 온 고등학생인 첫 손님은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관심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 책방여행을 통해 자신의 가치에 한 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그 순수하고 단단한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도 몽글하게 부풀었다. 나는 손님의 오늘과 내일을 마음 가득 응원했다. 그리고 뭔지 모를 시선이 떠나간 첫 손님의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언젠가부터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갖은 핑계를 둘러쓰고 마치 쓰고 싶은 나를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방해받는 것처럼 어딘가로 깊이 숨어들고 말았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순간을 하나둘 끼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책에 대한 작은 생각들을 적어 책 옆에 나란히 놓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기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곳. 책과 책장 그리고 어느 하나 튀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의자와 선반, 장식장, 화병에 담긴 마른 꽃마저 어느 하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없었다. 그랬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결국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해 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 그들과 눈을 맞추고 몸을 기울여 함께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결이 꼭 맞는 당신이 있을 거라는 기대.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했던 이곳.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오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마음의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시간 괜찮으시면, 좀 더 계셔도 좋아요.”


더 머물러도 좋다는 책방지기의 이야기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굳게 닫힌 마음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 자신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더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첫 일일책방지기인 내게도 첫 손님으로 와준 학생에게도 오래 머물러도 좋다는 다정한 말이 소중한 날이었기를.



철길마을 데이트에 책방으로 들어온 모녀와 책방을 한참 둘러보고 나간 손님, 희망도서 대출 반납을 하러 온 손님, 친구들과 함께 와한 권의 책과 빈티지 컵을 구입한 손님, 기분 좋은 설렘을 보여준 커플손님까지. 내게는 귀한 손님으로 손님은 나를 어느 작은 도시의 책방지기로 기억할 오늘.



그들에게 나는 어떤 책방지기로 기억될까. 어쩌면 나와 그들이 주고받은 건 단순한 물성과 값이 아닐지 모른다. 누군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꿈의 시간을 함께 했고, 같은 음악을 듣고, 영원히 기억될 하루의 어떤 순간을 공유한 특별한 만남. 어쩌면 예정되어 있을지 모를 시간. 그리고 나의 꿈이 실현되었던 어느 가을의 첫 길.



이제는 일일책방지기의 자리를 다시 비워둘 시간. 이름 모를 일일책방지기의 흔적이 닿고 닿아  더 깊어져 갈 이곳. 언젠가 또 이 세계에 들어와 날 부르는 책들의 먼지를 털고  책방의 온기를 함께 만들어 갈 누군가를 기다리는 순간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찰나의 계절. 어지러웠던 마음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가고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 상처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아련한 가을의 빛. 이 빛이 이끄는 곳을 따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면.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숨 고르기 할 시간. 나는 지금 오후 네 시 삼십 분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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