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칠레의 야간족들이 쓰던 단어인 mamihlapinatapais(마밀라피나타파이)가 한국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다. '서로에게 필요하지만 내가 먼저 하고 싶지 않은 어떠한 것에 대해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눈빛'이라는 긴 뜻의 단어는 한국에서 "조장하실 분"으로 바꿀 수 있다며 사람들은 웃었다. 이처럼 다른 나라말에 마땅히 대응할 단어가 없다는 점은 우리나라 말 중 '한(恨)'과 포르투갈어인 '사우다지'와 같다.
포르투갈어 사전에 사우다지를 검색하면 후회, 향수 등의 단어라고 나온다. 다만 이것을 브라질 사람이나, 포르투갈 사람에게 말하면 너무 거친 번역이라고 싫증을 낼 거다. 포르투갈어를 번역할 때 앞서 말한 듯 후회, 향수라고 대체한다면 읽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차마 그 단어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뉘앙스를 무시해버리기에 감정에 여백을 남긴다. 마치 한(恨)을 sadness라고 쓰면 아쉬운 느낌을 받듯 말이다.
미약하게나마 옮겨보자면, 사우다지는 사랑한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 무언가를 떠올릴 때 얻는 행복감 그러나 그것이 현재 부재라는 것을 동시에 자각함으로써 우울함도 느끼는 것. 앞으로는 영영 나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슬프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정이 너무 찬란했기에 우울감에만 빠지지 못하는 감정을 뜻한다. 이사하며 연락이 끊긴 친구들, 비슷하게 근황을 알 수 없는 한때 친했던 이들, 학창 시절에 짝사랑했던 누군가 모두가 사우다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상을 사람이나 물건처럼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사우다지의 의미 또한 확장된다. 여름날 우연히 내가 다녔던 학교 주변을 지나다가 들려오는 운동장의 아이들 목소리에 멈춰 서서 추억에 잠기는 일. 5교시 약간의 포만감과 따스한 햇빛에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흘린 땀에 종이가 팔에 달랐다 떨어진다. 점심시간에도 그렇게 뛰어다녔을 텐데, 힘은 어디서 나는 건지 운동장의 아이들은 체육시간이라고 또 축구를 하고 있다. 창에 막혀 작아진 아이들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더 이상 눈꺼풀을 들 수 없게 되어 사르르 잠에 빠지던 오후를 떠올리는 것.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돌아간다 하여도 그다지 바뀌지는 않을 것만 같은 기분. 모순된 감정 사이에 버무려진 또 하나의 감정이 사우다지가 된다.
이런 사우다지를 우리는 언제 느낄까?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는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베어 문 순간, 어린 시절 숙모가 만들어 주던 마들렌을 떠올렸다. 자신의 경험을 주인공에 대입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고, 곧 그의 대표작이 됐다. 작가와 소설이 유명해진 후. 향을 매개체로 하여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으로 부르게 됐다. 나에게 있어서 대중목욕탕 곰팡이의 쿰쿰한 냄새는 3단지에 살 적 아파트 사이에 있던 환풍기를 떠올리게 한다. 또 그때 환풍기에서 나오는 공기를 맡으며 이거 대중목욕탕 냄새 같아!라고 말하던 것까지 기억난다. 다만, 프로스트 현상을 향에만 국한시키고 싶지 않다. 향기, 음악, 사진, 음식 어쩌면 앞서 말한 운동장의 소음마저도 프로스트 현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프로스트 현상은 우리에게 사우다지를 스며들게 할 수 있다.
Frank sinatra의 Fly me to the moon은 제주도에서 발목이 너무 아파 이틀 동안 숙소에서 쉬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고, 9와 숫자들의 빙글은 머리가 너무 아픈 날 따스한 22번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학원가로 가던 날을 떠올리게 한다. 막연히 생각하려 하면 안개가 꼈던 기억이, 노래를 들으면 말끔히 생각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럴 것이다. 플레이 리스트 속 우연히 선택된 노래에, 한입 베어 문 음식에, 길거리에서 코까지 흘러온 향기에 멈춰 서서 이유 모를 감정-기쁨, 슬픔이 공존하며 왠지 모를 그리움 또한 느껴지는-에 휩싸이는 경험을 다들 겪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우다지에 잠겨 살아가고 있다. 다음에 이런 기분이 든다면, 아 이런 게 사우다지구나 하고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더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