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하게 빛나는 촛불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낍니다. 따스한 바람으로 봄을 느끼는 이도, 비릿한 비 냄새로 여름을 느끼는 이도, 주위 사람들의 옷매무새로 겨울을 느끼는 이도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이 또 매력이 느껴지는 방식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낮과 밤의 사이에서 계절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볼까요. 해가 질 무렵에, 나는 실내에서 벽을 바라보고 있고 빛은 유리창을 통과해 내 시선에 머뭅니다. 이때 햇빛 속에서 느껴지는 온도를 통해 계절을 느낍니다. 봄으로 치면 따스하고 시원함, 여름에는 뜨거움과 뜨거움, 가을은 뜨거움과 시원함, 겨울은 차가움과 차가움 사이입니다. 잔열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햇빛 속 잔열의 지속 시간.
요즘은 가을입니다. 낮에는 에어리즘이 다 젖을 정도로 한없이 덥지만, 밤이 되면 또 추워지기에 외투를 챙기고 나가거든요. 간극 때문에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면 조금 춥다로 얘기를 시작합니다. 빨리 실내로 들어가자고 재촉하는 말이기도 하죠. 이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을에는 별명이 많습니다. 공활한 하늘, 독서의 계절, 가을 탄다, 단풍의 계절 등등... 저는 이 중에서도 '가을 탄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쓸쓸하다는 느낌이 제가 계절을 느끼는 방식에 썩 잘 어울리거든요. 또 이 방식 때문에 가을에는 시티팝을 듣습니다.
앞서 잔열의 지속시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가을은 잔열이 굉장히 중요한 계절입니다. 낮과 같은 온도가 밤에는 없기에, 낮의 햇빛으로만 남은 밤을 보내야 하거든요. 특히 차이가 타 계절에 비해 크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따스함이 사라진 밤은, 흡사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같습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지낸 행복함으로 긴 밤을 보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무심코 가을에 동질감을 느껴 버립니다.
잔열에 의존해야 하는 내가 가끔은 서글퍼집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신나는 노래를 들어봐도, 되려 낮이 떠올라 슬픔을 가속시킬 뿐입니다. 다만 시티팝은 조금 다릅니다. 시티팝을 들으면, 버블 경제가 떠오릅니다. 곧 있을 비참한 말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과도하게 밝은 노래는, 마치 낮의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거품처럼 펑하고 터져버릴 빛나는 기쁨들은 아슬하게 빛나는 촛불입니다. 사그라든다면, 칠흑 같은 어둠에 방금의 불빛이 눈에 자국으로 남아 아른거릴 뿐입니다. 햇빛 속 잔열처럼요.
사실 감정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심경 변화의 이유인 멜라토닌과 세로토닌도 결국 여름과의 일조량 차이니 썩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만, 줄어든 일조량에 적응하는 날이 올 거고, 덜 울적해지면 다른 장르를 들을 겁니다. 아마 그때는 또 XX의 계절이라며 주야장천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듣겠죠. 나에게 가을 초입은 시티팝의 계절, 가을 후반은 얼터네이티브 락의 계절입니다. 나는 그렇게 노래를 듣습니다. 계절에 맞추어 기분에 맞추어 또 잔열에 맞추어
시티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전에 있던 신스팝과 다를 게 뭐냐! 고 불편해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에게 시티팝은 버블경제 당시 그리고 전의 몇 년 동안 발매된 노래에 한정된다.
처음으로 시티팝을 들은 건, 중2 ~ 중 3 무렵이었을 것이다. 보통 시티팝하면 타케우치 미우라의 'plastic love'로 처음 알게 되겠지만, 나는 junko ohashi의 'telephone number'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매료되어 몇 달을 계속 시티팝만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막연히 신나는 리듬이 좋았지만, 어느 날 그 후 버블경제가 있었단 걸 알게 된 후로 한 줌의 우울도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되려 기분 좋은 날에는 시티팝을 안 듣는다. 오히려 슬플 때, 힘이 없어도 해야 할 게 있을 때 찾아 듣는다. 그렇게 듣는다.
지금도 시티팝을 좋아한다. 처음으로 일본에 여행 갔을 때도 junko ohashi의 magical 앨범 lp를 사려했을 정도로. 언젠가 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