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인가?
해야 할 것을 미룬 채 하는 딴짓은 얼마나 달콤한가. 먹으면 필히 탈이 날것을 알지만, 나 또한 그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즐긴다. 카페에서 과제를 하다가 늦은 시간에 집에 왔음에도 왠지 모를 의무감에 책상 앞에 앉았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의자에 누워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두 눈은 책상에 꽂혀있는 책들로 시선이 돌아갔다. 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료를 떨치는데 조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일기장을 펼쳤다.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읽다 보니, 재미는커녕 우울에 빠졌다. 이렇다 할 기억이 나지 않던 시기에 대한 기록이었기에, 더욱 궁금했지만 조금 읽고 나서는 기억으로 남기기 싫어서 그 기간을 머릿속에서 지운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일기 속 우울은 매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하루를 부질없이 살아서 했고, 또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있어서이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의미 없는 오늘을 얘기하며 하루를 고의로 잃어버린 것인지, 타의로 흘린 것인지 혼란스러워했고, 그런 상황에서 탈출시켜줄 동아줄이 너무 많아 내게서 빛을 앗아갔기에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라 정의했다. 사는 것은 스스로를 받쳐 결과를 이룬 자들에게 수여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고, 그렇기에 자신에게는 날을 보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했다. 또 그것을 앎에도 바뀌지 않는 자신에 대해 역겨워했다.
그에 비해 후자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해야만 하는 것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도 잘 나오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괴롭다고 했다. 그가 성공하면, 그 때문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좌절한 이들을 보는 것이, 반대로 상대방이 성공하면 노력의 허무함을 느끼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자신을 봐야 한다고 슬퍼했다. 학생이기에, 사회가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음을 그도 알고 있었지만, 이상주의자인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들이 그를 좀먹는 게 심해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사고의 물레바퀴를 돌리다가 도서관에서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나도 일기장을 덮었다. 옆에 4~6권의 일기장이 있었지만, 딱히 읽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런 기록이 쓰였던 그 겨울방학에 대해 생각했다.
나무가 되고 싶었다. 황지우 시인의 시 속에서의 나무처럼 끝내 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꽃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 세상 속 저마다의 꽃피운 나무들을 봤지만, 그것이 꽃피운 과정을 모른체했다. 그렇기에 과정 속 힘듦이 생소했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지만, 열매에 대해 집착했지 얼마나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끝에 있는 과실이 이 쓴맛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몇 번을 스스로 되물어도 답은 구할 수 없었고, 으레 신념 없는 행동이 쉽게 무너지는 것처럼 나무가 되고자 했던 행동들은 겨울방학 동안 결국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개학할 즘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고, 그토록 바랐던 열매를 어느 정도는 맺었다. 물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은 많지만,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 100을 위해 목매달지 않고 딱 51 정도 과반수의 행복을 위해 산다. 물론 누군가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고 나를 타박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지금 내가 되고 싶은 나무는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는 거목이 아닌, 어딘가 못생긴, 그러나 정감 가는 나만의 나무가 되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것, 그때와 다른 의미로 스스로에게 되묻는 질문이 있다.
‘나는 나무인가. 나무처럼 견디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