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의 영어 꽃말과 수채화로 그린 그림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그려본 능소화

Jul 9. 2025

서귀포에서 살던 동네에서 아래로 난 큰길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돌담너머로 꾸며진 아기자기한 정원에 커다란 능소화나무를 심은 집이 있었어요. 한여름, 꽃이 한창 필 때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만개해 있는데 마치 나무 모양이 커다란 우산 같고 꽃들이 우산에 맺힌 빗물처럼 피어있어서 더없이 아름다워요. 비가 갠 어느 오후에 그 집 앞을 지나가다 꽃이 절정으로 핀 자태가 너무나 황홀해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침 집안에서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던 집주인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얼굴 표정에 담긴 능소화에 대한 자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보였습니다.

'웬 여자가 우리 능소화 사진을 심혈을 기울여 찍고 있네. 꽃 잘 키운 보람이 있군. 예쁜 사진 많이 찍고 가세요!'

꼭 이렇게 말하는 듯 다정한 마음이 담긴 눈빛이었어요.

그렇게 찍은 능소화 사진을 보며 난생처음 능소화 꽃을 수채화로 세밀하게 그리기 시작했어요. 능소화의 꽃잎 안에 어지럽게 뻗어있는 가느다란 붉은 핏줄 잎맥 무늬가 제 눈알 위에 미러링 되어 나타날 만큼 충혈까지 유발해 그리기 고되고 힘들지만 다 그리고 나니 보람이 느껴져 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립니다.

밑그림 위에 수채화지를 대고 빛을 이용해 선을 따라 그린 뒤(라이트박스나 유리창 이용) 수채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요즘 집중을 잘 못하고 성인 ADHD증상이 아닐까 의심되는 산만함이 커져 꽃그림을 그리다 말고 그리다 말고를 반복하다 보니 이 그림 한 점 그리는데 반년이 넘게 걸렸어요. 물론 중간에 다른 그림들을 그리기도 하고 일도 했지만 이 꽃에 오롯이 몰입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나날들이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제주도서 유배생활한 지 3년 반이 넘자 많이 치유된 제 영혼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제주도를 떠나 발리로 와서 그림 그리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림 그리고 행복하자며 마음 다잡고 지구에서 이 몸으로 살 때까지 그림 그리며 살기로 제게 맹세했어요. 그림 그릴 때 비로소 숨 쉬는 것 같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에요.

멜번에서 그림 그리던 한때

언젠가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서 작가 겸 도슨트 정우철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을 때 화가 뭉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참 아팠던 적이 있어요. 노르웨이의 예술가 뭉크는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불안, 우울, 공황 등의 신경증이 심했고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죽고 싶은 충동을 다스렸다고 해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몹시도 괴로웠던 뭉크는 살기 위해서 붓을 잡았고 그의 내면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뭉크의 "절규" 출처 : 위키피디아

그저 살려고 그림을 그렸던 가여운 뭉크를 떠올리며 저도 눈이 안 보일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능소화의 꽃가루는 정말 눈을 멀게 하는 독일까요? 어릴 땐 정보가 없어서 그저 흘러가는 유언비어를 믿고 능소화만 보면 눈을 질끈 감고 뛰어 도망간 기억이 있는데요,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능소화 꽃가루로 실명이 된 사례는 없다고 하네요. 그러니 다들 안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