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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찻잔 안에 붓을 헹구던 열정적인 예술인

영국 브라이튼마켓에서 만나 내게 그림을 배우던 학생 H

by 논이

2014년 영국 브라이튼 바닷가 갤러리에 아주 작은 작업실을 마련해 매일 그림 그리던 열정 가득한 십 년 전의 나를 기억하면 덩달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tempImagebAHPED.heic 작업실. JAG Gallery
용돈벌이를 위해 부업으로 만들던 책목걸이.

브라이튼 마켓에서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과 그림을 팔 요량으로 야심만만하게 신청서를 제출하고 드디어 당일 아침 택시를 불러 작업실에서 짐을 싣고 마켓으로 향했다. 11월이었지만 굉장히 싸늘했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지는 영국 특유의 길고 습한 겨울날씨로 온몸에 한기가 엄습했다. 결국 하루 종일 야외마켓에 의자도 없이 서서 덜덜 떨며 장사하고 그림 그리느라 그만 독감에 걸려 열흘을 앓고 말았다.


한평생 담배를 피워 기관지가 망가진 영감님이 막걸리 마시다 사레들린 것처럼 심하게 기침을 해대고 열이 펄펄 나 작업실에도 못 가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나는 하도 아파서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독감으로 죽는 사람들도 전 세계적으로 한해 20~60만 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해 여름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시는 꿈을 꾸고 몸이 많이 나아져 열흘 만에 일상으로 돌아가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도중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 노니! 브라이튼 마켓에서 만난 H야. 너한테 그림을 배우고 싶은데 작업실에 가도 돼?"


2010년 호주 멜번에서 그리기 시작한 장미. 이 사진도 멜번 크래프트 마켓에서 그림 그리다 찍힌 사진이다.


너무 추워서 아무 색깔이나 입히며 채색하던 브라이튼 마켓에서
그림 그리다 입 돌아가는 줄 알았다


'누구지? 아!!!"

그날 손님이 없어 수채화로 장미를 그리는 중 아주 큰 리액션을 퍼부으며 내게 빛처럼 다가온 H였다. 그녀는 내가 그린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며 꼭 그림을 배우고 싶다면서 명함을 받아갔고 정말 연락을 해온 것이다. 마침 감기도 나았고 그림 배우고 싶다는 사람도 나타나 기쁜 마음으로 작업실에 그녀를 초대했다.


산뜻한 단발의 웨이브진 금발머리에 환한 미소가 매력적인 H는 남미출신 승무원으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림에 관심이 많고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는 첫 그림으로 기린을 그리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영국에서 돈을 받고 가르치는 그림이라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수업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가르치는데 H의 그림을 향한 열정은 옆에 켜둔 난로에서 나오는 열기보다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올랐다.


그다음 주에 펼쳐진 두 번째 수업으로는 그녀가 그리고 싶어 한 핑크색 꽃 사진이 담긴 폰을 보며 그리는데 고도로 몰입해 그림을 그리던 H의 태도에 흡족해진 나는 녹차를 한잔 가져다주었지만 그녀는 차 마실 시간도 아끼려는 듯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그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그녀의 수채물감이 묻은 붓이 찻잔 속으로 입수하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H는 그림에 온신경이 가있느라 찻잔을 붓 헹구는 물통으로 착각하고 녹차에다 신나게 붓을 휘저었던 것이다.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그림에만 집중해야 나올 수 있는 고도의 신공이며 진짜 예술가만 할 수 있는 짓이다.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음을 밝힌다.

녹찻잔 안에 다이빙한 붓이 너무 웃겨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대단한 신공의 그녀

잠시의 재밌는 소동으로 우린 깔깔대며 웃었고 H의 수채화로 그린 화사한 꽃그림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그 후 몇 번을 H와 더 수업하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우리의 유쾌한 미술시간은 끝이 났지만 녹차와 기린을 보면 어김없이 그녀가 생각났다. 한국에서 일상에 적응해갈 무렵 그녀의 연락을 오랜만에 받고 미소가 지어졌다. H가 결혼을 앞두고 아기를 가진 것이다. 밝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그린 수채화 기린처럼 귀엽고 예쁜 아가가 태어나 화목한 가정을 꾸렸기를 빈다. 지금쯤 그 아기는 호기심 많고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이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밝은 에너지가 흘러넘치던 H를 떠올리며 향긋한 녹차 한잔 마실까 한다. 붓은 저 멀리 멀찍이 둔 채로.




*그림 감상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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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라이튼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워터프루프 펜으로 선을 따라 그려 펜드로잉을 완성했다



수채물감으로 펜드로잉 위에 채색을 시작한다
채색을 마치자 펜선이 물감 밑으로 숨어버려 다시 펜선을 진하고 올곧게 그려야했다.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린 작업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그림이다. 사이즈는 A5.


종이는 아르쉬 수채화지 세목, 펜은 피그마 마이크로 펜01, 005, 물감은 홀베인 수채물감을 사용했다. 붓은 국산만 사용. 화홍, 루벤스를 주로 애용.


마켓에서 그리던 그림을 작업실에서 완성 후 판매에 성공했다.



감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 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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