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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식 안 먹어도 외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

나를 구원해 준 헬렌 니어링과 생애 첫 비건 선배 율리아 이야기

by 논이

역마살을 주체 못 해 발리에 온 지도 벌써 4주째입니다. 실연을 당해도 밥은 절대 굶은 적이 없는 식탐 많은 인간이 외국에서 뭘 먹고 사는지 기록해보려고 해요. 처음 며칠은 우붓에 널린 채식당에서 매일 끼니를 해결하거나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때웠고 동네에서 주말에 열리는 Farmer's market에서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잔뜩 사다 먹었어요. 지금은 빈땅수퍼마켓에 매일 아침마다 산책하며 들러 식재료를 사 옵니다. 유기농 현미가 굉장히 저렴하고 채소는 한국에 비하면 싸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이에요. 그래도 달콤한 파파야와 망고가 착한 가격이라 아무 불만 없습니다. 열대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물가 비싼 한국보다 식비가 적게 들어 좋아요.



우붓의 인기 최고 비건식당 Sayuri Healing Food Cafe에서 먹은 현미 건강식 nourishing bowl. 매일 저녁 라이브 콘서트가 펼쳐지는 힐링 채식 카페



실은 발리에 오기 전 한인마트가 우붓에 없다는 걸 구글 검색 후 두려웠어요. 코로나로 고생하다 영국에서 귀국 후 제주에 살며 비건이 되었고 해외에서 못 먹은 한식의 한을 풀려 현미 채식을 3년 동안 거의 매일 손수 만들어 먹었기에 한국음식을 못 먹으면 큰일 날 것만 같았어요.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내려가야 무궁화마트라는 한인마트가 있다는데 왕복 두 시간이 너무 아까워 깻잎과 김이 미치도록 그리울 때 큰맘 먹고 갈 생각이에요.


고기공화국 한국에서 왕따가 될 위험을 감수하고 엄격한 채식을 하며 기름, 가공식품도 거의 끊고 유기농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의 필수양념을 구입해 김치, 반찬, 국을 열심히 만들어 건강과 혀의 만족을 위해 이 한 몸 갈아 넣었지만 손이 느려 요리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에너지를 다 쏟아 쉽게 지쳤어요. 왜 가정식 백반집이 소멸되고 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죠. 보통 인내심과 정성과 체력이 아니면 한식 반찬을 여러 가지 만드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에요. 다듬어 씻고 벗기고 잘라서 다지고 빻고 찌고 삶고 볶고 끓이고 짜고 거르고 무치고 데치고 버무리고...

한식이 최고로 맛있긴 하지만 제작과정의 수고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끝없는 정성과 노동을 갈아 넣어도 한순간에 흡입해 사라지는 음식에 허망하구요. 요리 천재였던 우리 엄마를 비롯해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과(요리하는 아버님도) 한식을 전수해 주신 지혜로운 우리 조상님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서민의 고봉밥. 국그릇은 대야만 하다. 출처 : 나무위키

고봉밥을 드시고 입가심으로 큰 복숭아 8개를 해치우셨다던 우리 조상님들의 대식가 밥심 유전자를 이어받아 저도 식탐 많고 폭식을 일삼던 잡식성 곰이었지만 채식주의자가 되고 난 후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살짝 줄었어요. 그토록 사랑하던 순대, 보쌈, 선짓국, 생선, 유제품 등의 동물성 식품의 폐해와 진실을 알고 나니 그것들을 갈구하던 마음이 기적처럼 잦아들었고 지구, 건강, 동물 그리고 영적 성숙을 위한 길은 엄격한 채식뿐임을 자각하며 비건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고기 끊은 지 햇수로 7년, 비건 된 지는 4년째로 아직 초짜에 새싹 비건이지만 지구에서 이 몸으로 살 때까지 풀만 뜯기로 다짐했습니다.


발리에서 6개월 살기로 결정하고 제일 걱정된 건 먹거리였지만 출국 한 달 전 도서관에서 만난 책 <소박한 밥상>(헬렌 니어링 지음)이 음식에 대한 집착을 조금은 내려놓게 해 주었어요. 1904년에 태어난 헬렌 니어링은 경제학자인 남편 스콧 니어링과 미국 버몬트의 자연 속에서 평생 채식을 하며 주치의나 약사도 없이,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지도 않고 91세(헬렌), 100세(스콧)까지 건강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어요. 그녀의 책 <소박한 밥상>에 따르면 60%만 배를 채우는 소식을 하고 웬만하면 날것 그대로 섭취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소식하라는 대목을 읽었을 때 제 동공은 지진이 난 듯 흔들렸어요. 어떻게 60%만 먹을 수가 있을까요? 늘 200%는 족히 넘기는 대식+폭식곰에겐 실로 가혹한 양입니다. 채식을 해도 적게 먹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제게 60%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에요. 다행히 가공식품을 대부분 끊으며 매일 먹던 과자나 빵, 라면, 아이스크림을 제 인생에서 거의 몰아냈기에 폭식을 해도 현미밥을 몇 주걱 더 퍼먹는다던지, 과일을 배 터지게 먹는 걸로 제 안의 걸신을 달래줍니다. 소식은 더 나이 들어 신진대사량이 떨어질 때 소화능력도 약해지면 차차 하기로 해요.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날것 그대로 먹기인데 껍질도 벗기지 말고 먹는 게 좋다고 해요. 가열해야 할 경우엔 10분을 넘기지 말고 웬만하면 살짝 데쳐먹으라고 하는 그녀는 날감자를 얇게 썰어 다른 과일과 함께 손님들에게 애피타이저로 내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날감자인지 모르고 식감이 좋다며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는데 그 맛이 궁금해 조만간 저도 한번 먹어보려고 해요.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데 쓰자. -헬렌 니어링 <소박한 밥상> 중에서


이 천상의 문장에 저는 감격에 겨워 인생의 구세주를 만난 듯 그녀가 살던 미국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대부분을 날것 그대로 간단히 조리해 먹는다면 굳이 반찬을 공들여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 얼마나 좋은가요! 부엌일에서 해방되어 예술과 자연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는 아름다운 아이디어라니요! 하긴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인데 굳이 에너지를 쥐어짜 힘들게 요리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세치 혀의 만족감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어렵게 요리를 하고 비싼 돈을 주고 식당에 가나요? 나올 때는 다 똑같은데 말이죠.


백만장자 전 남자 친구 덕분에 5성급 호텔 식당에서 밥을 수도 없이 먹어봤지만 기억에 남는 요리는 단 하나도 없어요. 그의 어머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최고급 호텔 런던 리츠에서 먹은 만찬도,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머문 신라호텔의 룸다이닝 서비스도 금세 잊혔어요. 호텔조식으로 나온 열대과일의 상큼한 맛에 감탄한 적은 많아도 예쁘게 장식한 코스요리는 이상하게도 미식가인 제 기억 속에서 깡그리 전멸했어요. 자연스러운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부자연스럽게 양념을 가하고 가공한 식품일수록 몸에 해로워요. 특히 공장에서 생산된 식품첨가물(화학약품) 범벅인 가공식품은 이미 죽은 음식인 데다 우리 몸을 살리기는커녕 망가뜨립니다. 초가공식품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아요. 높은 열량과 낮은 영양가, 비만, 심혈관 질환, 제2형 당뇨병, 암, 우울증 등 다양한 질병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을 때 같은 집에 살던 플랫메이트 율리아는 채식에 문외한이던 그 당시 제 눈에 한마디로 외계인 같은 존재였어요. 독일에서 건너와 법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매일 저녁 냄비에 호박, 감자, 양배추 따위의 온갖 채소를 통째로 때려 넣고 뚜껑을 연채로 몇 분 삶은 뒤 불에서 내려 솥째 2층 방에 후다닥 들고 가 홀로 먹었어요. 소금 같은 기본양념도 배제한 채로요. 같이 살던 아일랜드인,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캐나다인 등 열명이 넘는 서양인들 눈에도 이상해 보였는지 그녀의 식습관을 대놓고 쑥덕거렸죠. 워낙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양문화라 그녀가 먹는 걸 두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특이한 식사를 하는 율리아가 그들 사이에서도 별종이긴 했나 봐요.


그런 율리아가 제게 자신이 왜 그런 식습관을 지녔는지 설명해 주었는데 이유가 꽤 슬펐어요. 율리아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온 가족이 큰 충격에 빠진 후 어머니 죽음의 원인이라 여기던 식습관부터 바꿨다고 해요. 율리아도 모든 음식을 즐겨 먹던 잡식성이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채식주의자가 되고 그 어떤 양념도 첨가하지 않는 순수자연식물식으로 살아가게 된 거예요. 그녀는 설탕도 밀가루도 기름도 먹지 않았어요.


남들 눈에 또라이같이 여겨지던 율리아의 식습관이 지금 돌이켜보니 완전 건강식이고 백번 옳았던 것 같아요. 그녀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던 걸까요? 그로부터 15년 후 제가 비건이 될 것을 알기라도 하듯 율리아는 저를 특별하게 대했어요. 율리아는 툭하면 제게 아름답다고 하고(그 당시 여드름 수만 개가 바글거리던 오이피부인 저를!), 제 방문 앞에 꽃을 여러 번 두고 가기도 했으며 생일엔 진주귀걸이를 선물해 주며 으스러지도록 저를 안아주었어요. 제가 원인 모를 병으로 크라이스트처치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맬 때 자주 병문안 와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꼬옥 안아주기도 한 정 많은 그녀였지만 그땐 율리아가 저를 좋아하는 게 부담스럽고 통채소만 뜯는 게 이상해서 조금 멀리했었죠. 그때도 지금도 여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제가 너무 오만하게 밀쳐낸 것 같아 미안하고 더 다정하게 대할걸 후회가 돼요. 왠지 율리아는 어렴풋이 알았을 것 같아요. 언젠가 제가 자기처럼 채소만 뜯을 거라는 걸. 그래서 그렇게 제게 살갑게 대하고 특별대우를 해준지 몰라요. 다른 플랫메이트들은 본체만체하고 오직 제게만 다정하던 율리아였거든요. 같은 독일인도 소닭 보듯 했으니까요.


주말 저녁마다 펼쳐진 BBQ Night에 율리아를 뺀 모든 플랫메이트들이 모여 고기를 그릴에 구워 물고 뜯고 씹으며 춤추고 술 마시던 기억이 나요. 그때 그녀는 홀로 자신의 방에서 외로웠을까요 아니면 채소를 뜯으며 행복했을까요.





종이 위에 수채물감



날당근이나 노란 생 파프리카를 아삭아삭 씹어 먹을 때 저는 순수하고 무해한 토끼가 된 느낌과 동시에 감정의 부자가 된 듯한 행복감도 선사받아요. 이 작은 식물을 깨물어 먹는 순간 행복해지면서 미안해져요. 헬렌 니어링은 당근을 먹을 때마다 미안하다고 읊조리며 한입 베어 물었다고 해요. 인간으로 산다는 건 죄를 짓는 일 같아요.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쳐야 하니까요. 가진 것 하나 없이 태어나 살면서 지구에서 공짜로 받은 게 너무 많아 그저 고마워하며 겸손하게 먹고살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채식이야말로 가장 간단하고 깨끗하고 쉬운 식사법이다. 나는 식물과 과실, 씨앗, 견과를 먹고사는 것이 이성적이고 친절하며 자각 있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헬렌 니어링 <소박한 밥상> 중에서


백 년 전에 태어난 나의 비건 선배님 헬렌과 뉴질랜드에서 만난 첫 비건 선배님 율리아에게 감사하며 아침으로 과일을 먹고(파파야, 망고, 바나나, 사과, 레몬 등) 이른 저녁으로는 현미 머슴 고봉밥에 간단한 국을 끓여 여러 채소를 곁들여 먹어요. 채소 먹는 폭식곰은 발리에서도 풀 뜯으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답니다.



종이 위에 수채. 코로나에 걸렸을 때 의지하던 식물친구들을 그렸어요. 논이 그림 2021년






꽃과 별이 숨어있는 파파야는 예술적인데다가 달콤하고 부드러워 최애 열대과일로 등극했어요


징그러운 뱀껍질을 똑닮아 이름이 Snake Fruit인 살락과 복숭아향이 물씬 나는 마르키사를 호스트한테 선물받았어요


옐로우 플라워카페에서 먹은 트로피칼 푸룻볼과 쌀가루로 만든 팬케이크. 채식당 알케미의 민트티와 생당근 비건 케이크(식감이 별로. 호기심과 식탐으로 주문한 과보였어요)


아침으로 먹은 Fruit platter와 간에 기별도 안간 김치스프링롤. 양이 적어 참 아쉬운 식당 Moksa
집 근처 비건식당 Moksa에서 자주 먹었지만 모기에 열심히 뜯기고 이제 안가요. 모기 기피제도 뚫고 무는 아디다스 모기 서식지이지만 정말 맛있는 식당이에요
Moksa Ubud
수박주스가 최고였던 클로버 카페. 채식당은 아니지만 괜찮은 카페예요
분위기도 맛도 좋은 비건식당 알케미 우붓 Alchemy Ubud
알케미 터줏대감. 한국에서 챙겨간 냥까까를 주니 환장을 하고 달려들던 키티
그렇게 비건식당 알케미에서 친구가 생겼습니다. 털 많은 친구예요
알케미 특식 벤또. 현미밥때문에 시켜봤는데 연어스테이크인 척 하는 두부스테이크와 피클, 국 등이 나왔습니다.
집에서 대충 먹은 밥. 원래 저 양의 두세배는 먹는데 남은 밥이 저것뿐이라 강제 소식하고 알케미에서 현미 벤또로 저녁 식사하고 왔어요. 밥에 얹어진 건 자주색 고구마입니다.



채식화가의 꽃그림을 끝으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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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nonichoiart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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