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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비건식당 사유리에서 영화배우와 밥을 먹었습니다

Sayuri Healing Food Cafe, Ubud, Bali.

by 논이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우붓센터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사유리 힐링푸드카페라는 식당이 나타나요. 처음 간 날부터 사랑에 빠진 채식당 사유리는 발리에서 가장 핫한 장소 중 한 곳입니다. 그저 비건음식만 제공하는 흔한 채식당이 아닌, 거대한 에너지 센터에 영혼을 치유하는 힐링 공간이죠. 명상, 요가, 요리, 언어 등 여러 가지 수업이 펼쳐지는 사유리에선 남녀노소, 수많은 인종이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곳에선 매일 저녁 라이브공연이 펼쳐지는데 인도음악, 일본음악, 켈트음악,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즐길 수 있어요. 월요일마다 열리는 인도 음악 라이브 공연에서 인도 전통 현악기인 시타르를 연주하는 전인권 머리를 한 인간문화제급 뮤지션의 연주실력과 카리스마는 청중을 압도합니다. 어떤 말도 없이 과묵한 모습으로 그저 연주에 임하는 그를 보는 이들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여자 혼자 여행하기 위험하다는 인도에 내일이라도 무작정 가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의 시타르 연주가 절정을 향해 갈수록 무대아래엔 춤추는 연체동물들이 하나둘 늘어납니다. 마약 먹은 좀비인지 해파리인지 무아지경에 빠져 온몸을 흐느적거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집니다. 귀여운 사람들. 꼭 춤추는 다섯 살 꼬마들 같아요. 모두들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춰 자유로워 보여요.


직접 들으면 더 환상적인 감동의 인도음악 공연
금요일에 열리는 미요시와 트리오 무대.
아무나 노래자랑할 수 있는 오픈마이크 무대

주중엔 오픈마이크가 열려 누구나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고 금요일과 일요일엔 일본인 뮤지션들의 공연도 펼쳐져요. 가게 사장님 사유리의 최측근이 아닐까 추정되는 멋진 음악인들입니다.


제가 가장 애정하는 공연은 토요일에 열리는 켈틱 룸의 켈트음악 콘서트입니다. 스테이지 오른쪽 구석에 앉으면 밴드 바로 옆에서 공연을 볼 수 있는데 뮤지션의 옆통수만 보며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마치 저도 그 밴드멤버 중 하나가 된 것처럼 설레고 가슴이 뛰어요. 처음 그들의 공연을 접했을 때 뛰는 가슴을 주체 못 하고 아일랜드 초원을 마구 날뛰는 미친 말 한 마리처럼 자유로워졌어요. 신비로운 켈트족의 후예들이 사는 아일랜드에서 한 달, 스코틀랜드에서 4년 살다왔다고 그들의 정기와 영혼이 제게도 스며들었는지 이상하게 켈틱뮤직만 들으면 가슴속이 감동으로 가득 차서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눈물까지 날 정도로 찬란한 순간이었어요.


월요일 인도 음악 공연땐 너도나도 흐물거리는 해파리가 되어 춤추더니 토요일 켈트 음악엔 새끼양과 망아지가 되어 호빗처럼 폴짝폴짝 뛰는 춤을 춥니다. 춤추는 사람들과 연주자들이 밝고 경쾌한 음악의 리듬에 혼연일체가 되어 알코올의 도움 없이 흥분하고(사유리는 술을 팔지 않는 비건식당) 건전하게 음악과 춤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아일랜드와 제 영혼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순식간에 데려다주는 꾸밈없고 애잔한 선율의 켈틱뮤직을 저는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제 함성소리에 북(보드란)을 연주하는 에타가 돌아보네요



사유리에서 파는 음식도 맛있어요. 모든 음식이 신선하고 비건레시피라 위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요. 글루텐 프리로도 주문 가능합니다. 사유리는 한국인의 향수병도 치유해 줘요. 김치를 따로 주문하면 12000루피아에 먹을 수 있는데 기대보다 맛있어서 놀랐어요. 비건김치라 젓갈을 넣지 않고 담가 더 상큼하고 깔끔한 맛이에요.

제가 이곳에서 즐겨 먹는 메뉴는 너리싱볼 Nourishing Bowl로 주먹크기의 현미밥에 감칠맛 돌도록 조리한 템페 Tempeh(발효된 콩으로 만든 인도네시아 전통음식), 샐러드와 토마토, 오이, 자색고구마, Mung bean sprouts(녹두콩싹), 채소피클 등이 어우러진 간단한 일품요리입니다. 건강한 맛에 반하고 신선함에 감동해 요리하기 싫은 날 와서 종종 주문해 먹어요. 한 번은 크로크무슈 croque monsieur를 먹었는데 가지와 시금치가 입에 착착 붙었고 비건치즈가 맞는지 의문이 들정도로 느끼하면서 찐한 맛이 나쁘지 않았어요.

디저트류도 맛있고 다양해서 밥배를 다 채우고도 케이크 쇼케이스 앞을 매번 기웃거립니다.



무료로 발리 어를 배우고 수업 후에 점심으로 크로크무슈를 먹었어요
사유리에서 그림도 그리고 미치도록 귀여운 강아지도 만났어요!
매일 흡입 가능한 너리싱볼. 사유리 힐링푸드 카페


이곳에서는 합석이 자유롭게 이뤄져 저도 몇 번 테이블을 셰어 하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행 온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도 만들었어요. 얼마 전엔 자리가 없어 혼자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밥을 먹던 젊은 남자의 테이블에 합석했는데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눈을 의심할 정도로 초꽃미남이어서 숨죽이고 몰래 얼굴을 훔쳐봤어요. 밀랍인형 같은 피부, 스치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콧날,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지닌 스무 살 정도로 보이던 총각은 북유럽 신화에 나올법한 신비로운 마스크를 지닌 채 차가운 표정과 얼음 같은 눈빛으로 일관하며 도도하게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졌고 저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어요. 자린고비가 매달아 놓은 굴비 쳐다보며 밥 먹듯 꽃미남 얼굴 뜯어먹으며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말없이 고이 보내드렸습니다.


그 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서버분이 웬 남자분을 데려오시더니 자리가 부족해서 그런데 합석해도 되냐 묻기에 흔쾌히 승낙하고 새로 온 손님을 맞이했어요. 그가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에 앉으면서 맛있냐 묻길래 입안 가득 음식을 물어 볼이 다람쥐처럼 빵빵했던 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밥을 먹으며 그와 유쾌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어요. B는 일본에서 일하며 살다 발리에 휴가 온 에너지 넘치는 스페인 사람이었어요. 제 국적을 물은 그는 반가워하며 식당에 곧 합류할 일행이 요가하다 만난 코리안가이라며 오늘 저녁 굉장히 재밌겠다고 기대 가득한 얼굴이었어요. 드디어 한국남자분이 도착했고 그의 얼굴을 본 저는 그만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꺄아!! 너무 잘생겼잖아!!!’


네, 저는 꽃미남이라면 집문서도 기꺼이 내줄 원초적인 인간입니다. 방금 막 만화책을 부욱 찢고 나온 듯한 그의 화려한 등장에 동공이 확장되고 도파민이 팡팡 샘솟아 흘러넘쳤어요. 잘생긴 사람을 보면 뇌의 보상 시스템이 활성화된다고 해요. 피곤하고 무료한 일상에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쾌락의 호르몬 도파민이 터지는 동시에 입꼬리와 광대가 치솟더니 식당 천장을 뚫고 우주까지 올라갈 기세였어요.


"안녕하세요!"

발리에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한국분을 만나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고 그가 자리에 앉아 B에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걸 듣고는 다시 한번 놀라버렸습니다.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하기에 교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국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영화도 찍은 이력이 있는 배우 겸 모델이었던 거예요. 어쩐지 외모와 아우라가 남다르고 후광도 비치더라니.


상큼한 소년미+과즙미가 물씬 풍기는 얼굴인데 키는 엄청 크고 어깨는 태평양 같던 그는 목소리마저 감미로워서 가능성 있는 배우로 보였어요. 곧 미국에 오디션 보러 갈 예정인 포부가 남다른 배우님은 한국어, 영어, 일어, 프랑스어까지 4개 국어를 할 줄 알고 번역일도 하셔서 뇌까지 섹시한 남자였습니다.

B 역시 책을 낸 작가에, 5개 국어를 구사하고, 히말라야에도 가본 모험 정신 투철한 자기 계발의 선두주자였어요. 공통분모가 많았던 우리 셋은 인스타그램을 맞팔하기 시작했는데 B가 제 그림으로 가득한 인스타그램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배우님이 한국말로 나직이 말했어요.

내일 시간 되면 같이 점심 먹자고.


그다음 날 만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더 나눠보니 생각이 무척 깊고 시적인 데다 섬세하기까지한 그는 좋아하는 드라마(나의 아저씨)와 음악 장르가 저와 같았어요. 재즈 특히 보사노바를 좋아하는 남자분을 처음 만나 신기했고 감수성 풍부한 배우님의 취향에 미소가 지어졌어요. 술, 담배, 타투와 거리가 멀고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고, 진지하게 배우는 자세에 저도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부풀었어요. 저보다 아주 많이 어리지만 존경심이 들정도로 멋진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의지를 갖고 계신 배우님의 진취적인 긍정 에너지를 넘치게 받아와 행운 가득한 날이었어요.


낯선 곳에 혼자 머물며 외로움이 성큼 다가와 빠져든지도 모르지만 마치 영화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몹시도 설레고 꿈같던 이틀이었습니다. 발리에서 멋진 추억과 좋은 영향을 안겨준 배우님께 마음깊이 감사하며 할리우드에서의 건승과 행복을 빕니다.






사유리에서 그리던 그림. 아직 미완성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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