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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아름다운 집 그리기

우붓의 정글에서 산책하다 알게 된 것들

by 논이

심각한 기계치에 길치인 저는 운전을 못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한두 시간 거리쯤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뚜벅이입니다. 불편할 때도 있지만 다행히 걷는 걸 좋아해 많이 걸어도 아무 문제없고 오히려 걸으며 얻는 게 많아 웬만하면 매일 걸으려고 해요. 걸으면서 명상을 하고, 사색을 하면 창의력이 높아지고 아이디어가 샘솟으며 건강이 좋아지는 건 덤이에요. 걷다 보면 마음속 근심이 옅어지고 기분이 좋아지니 우울감도 잦아듭니다. 지금 머무는 발리 우붓에는 초록이 무성한 정글 속 산책로가 많아 평화롭게 걸을 수 있어 행운이에요.


그 특별한 산책길은 슈퍼마켓에 가는 길에 구글맵으로 알게 됐어요. 주택가를 걷다 사원을 지나서 미로 같은 지름길을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공기가 점차 맑아지며 수목이 우거진 초록공간이 조금씩 드러나고 계곡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요. 매연도, 소음도, 사람들도 조금씩 자취를 감추며 생명체의 생존과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나무들과 시냇물 그리고 청량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만이 저를 온전히 맞이합니다. 잎사귀가 넓어 해를 가리는 키가 큰 나무들 아래로 작은 제 키까지 뻗어 내려온 고구마 줄기가 연상되는 이름 모를 붉은색 줄기가 사방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으면 마치 타잔과 치타가 아아아 하며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아요.


상쾌한 피톤치드를 가슴에 담으며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왼편에 정글이 펼쳐지고 다소 높은 지대에 지어진 3층 집이 보여요. 누군지 몰라도 매일 정글뷰보는 낙에 살아갈 그 집을 보금자리로 삼은 운좋은 분의 데일리라이프를 상상해 봅니다. 입에 밥을 넣고 우물거리는 순간에도,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에도 심신을 편안하게 가꿀 복 받은 분의 삶이 아름다울 것이라 확신해요.


우붓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나무가 무성하다는 점이에요. 초록의 마법이 눈길 주는 곳마다 펼쳐진 우붓은 평화롭고 잔잔한 에너지로 저를 진정시켜요. 식재료 사러 슈퍼마켓 가는 길에 아름다운 집들도 보고 초록 기운 받으며 힐링도 하는 호사를 누려 영광인 동시에 깨닫는 점도 있어요. 빈땅 슈퍼마켓은 새 단장을 위해 현재 공사 중이라 뒤편의 건물에서 임시영업 중인데 공사장 인부 속에 여자분들도 많아 처음엔 그분들을 보고 놀라버렸어요. 그늘에 가만히 있어도 힘든데 아침부터 푹푹 찌는 햇볕 받으며 무거운 돌을 가득 넣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옮기는 발리 중년 여자분들을 보면 절로 겸허해지고 불만 덩어리인 제 자신을 반성하게 돼요. 노동의 대가로 월 30만 원가량의 돈을 받는다는 인도네시아의 노동자들은 그 힘든 일을 하는 와중에 좁은 길을 조심스레 비켜서며 제게 먼저 지나가라고 환히 웃으며 양보합니다, 머리 위에 돌을 잔뜩 이고서.


진심을 담아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며 미소가 순수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요. 그들이 건강하고 평온하고 풍요롭기를...



걷는 일은 나에게는 순수한 기쁨이자 세상을 알아가는 특별한 방식이었으며 자유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미구엘 토르가(포르투갈 시인)


니체는 1879년 여름, 하루에 여덟 시간씩 걷고 또 걸었다. 그는 겨울이 닥치면 날씨가 온화한 유럽의 남부도시들, 제노바와 니스로 떠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 도시들에 머물며 아침에 평균 한 시간을 걷고, 다시 오후에 세 시간씩을 걸었다. 엥가딘의 고산들과 질스마리아를 날마다 걸으면서 니체는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체험을 한다. 걷기가 영감을 주고, 내면에 감정의 강렬함이 차오르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니체는 더욱 걷기에 매달린다. - 장석주



그 산책로에서 발견한 어느 아름다운 집의 현관을 그려보았어요.

아르쉬 세목(프랑스산 수채화지) 위에 연필로 중요한 선을 그린 뒤 워터프루프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요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그린 펜드로잉. 위의 음식은 김치스프링롤(Moksa, Ubud)


나뭇잎 그릴 땐 너무 더워 꾸벅꾸벅 졸기도 했어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뭇잎 채색작업. 그래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드디어 완성. 펜은 피그마 마이크론 005, 01, 물감은 홀베인 수채물감.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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