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웬 Nov 27. 2021

미안해, 형이 학력고사 세대야

공부라는 게 다 때가 있더라

예나 지금이나 지겨울 정도로 따라다니는 게 하나 있다. '외국인 울렁증' 나는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대입 학력고사를 목표로 한 구시대적 암기 위주의 학습법에서 기인한 거라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영어 듣기, 안 들리는 놈들은 그냥 포기하고 다른 문제부터 풀어."

"독해가 비중이 가장 높으니 거기에 집중하도록."

"기본적으로 단어장 하나 정도는 씹어 먹어야 하고 상위권 학생들은 VOCA 22,000 정도는 떼야 된다."

"문법이 당락을 좌우한다. 기본 교재 최소한 10번 이상은 보도록."

그 어디에도 입과 귀를 이용한 영어는 없었다.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번역 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던 어느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적막감이 맴도는 늦은 시각 외국인  분이 들어왔다. 호텔 주변이나 역세권에 위치한 점포가 아닌 이상 외국인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이고 간혹 오는 외국인이라고 해봤자 거의 대부분 원어민 강사 거나 국내에 제법 오래 거주한 사람일 확률이 높기에 부족하긴 해도 가벼운 한국어를 쓰기에 당연히  손님도 그럴  알았다.


"Excuse me, Can you speak English?" 

유창한 발음에 순간 얼음이 되어 버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화려한 혀놀림이었다.

"No, I can't speak English very well. sorry." 날아가는 영혼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양반이 갑자기 웃으며 "Hey~~~쏼라쏼라 Joke 랄라블라 울랄라 You 블라 lying 쏼라"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해석은 되지 않았지만 들리는 단어들을 조합해본  ", 농담하지 ,  지금 나한테 구라 치고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같았다. 손짓 발짓  동원해서 그게 아님을 겨우 이해시킨   고객에게 "Slowly and Simply, please(최대한 천천히 간단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며 양해를 구했다.


"Okay, I see. Where is the 멸??"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얼음!!

"멸??? 무슨 멸???? What is the 멸???"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외계어가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뭔가를 찾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단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난감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마른오징어에서 생수 500ml를 짜내는 심정으로 고3 시절로 잠시 돌아가 머리를 쥐어짰다.

"Sorry.  I don't know what you are looking for." 내 입에서 나오긴 했지만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문장, 유창한 발음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나갈 법도 한데  손님, 포기할 줄을 모른다. 혼자서 이렇고 저렇고 설명을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급기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매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리 애타게 찾고 있는지 궁금해질 무렵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기쁨에 겨워하며 손에 들고 카운터에 와서 내민 것은......


그것은 바로...... 우유였다. 신기하게도 답을 알고 보니 앞서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들었던 '멸'이 '밀크'로 들리기 시작했다. 왜 멀쩡한 k를 묵음으로 처리했는지 그 손님이 야속했지만 그 손님 입장에선 평소 하던 대로 말을 했을 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내 장사 인생의 몇 안 되는 흑역사 중 하나지만 가끔 외국인 손님이 오면 그때 그 손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영어와 일본어 회화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언젠가 다니게 될 해외여행에서 발생할 의사소통의 불편함도 없애고 싶었고 무엇보다 앞으로 영어 공부를 할 딸아이에게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학생 시절에 비하자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꾸준히 하지 못했다. 돈을 벌긴 했지만 이리저리 쓰다 보면 월말쯤엔 늘 부족해서 교재 구입이나 학원 수강은 늘 뒷순위로 밀렸고 여유 시간도 매일 규칙적이지 못하고 들쭉날쭉 편차가 심해 매일 조금씩이라도 해야 하는 어학공부의 특성상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최근에는 영화나 미드, 일드를 보며   있다는 쉐도잉 학습법에도 도전을 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노안이었다. 40 중반쯤부터 찾아온 노안은 30 이상 책을 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점점 심각해졌고 무리해서 글을 읽으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수십   어디서  먹었는지도 기억해내던 뛰어난 기억력마저 감퇴되어 이제는 배우고 익히는 속도보다 잊어버리는 속도가 훨씬  빠른 지경에 이르고 보니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공부는   있을 때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시더니  말씀이 옳았다.  인생은 모든 것을 깨달을 무렵이면 너무 늦은  같을까?


문득    뉴욕 여행을 다녀온 지인의 일화가 생각난다. 맥도널드에서 호기롭게 주문한  'Mr. Lee' 부르는 소리를 듣고 카운터에 갔더니 자신이 주문한 음식이 아닌 다른  나왔다고. 그런데도 도무지 클레임을 제기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냥 주는 대로 먹고 나왔다는 슬픈 이야기.


나도 그런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텐데 점점 몸은 따라주지 않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 늦어지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데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미국에 가더라도 우유만큼은 자신 있게  마실  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웨어 이즈 더 멸~~~??"







매거진의 이전글 내 얘길 들어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