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내가 없어져야 더 행복할거란 생각
어렸을 때 나는 가족 안에서 연결감을 느끼지 못했다. 언니는 부모에게 원하던 아이였고, 나는 생겨나서 곤란한 아이였다. 언니는 음악영재에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 하는 게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학생회장을 도맡을 정도로 인기도 많고 사회성도 좋았다. 반면에 나는 딱히 잘하는 것이 없었다. 내성적인데다 친구도 없었고, 작은 일에도 잘 울었다.
게다가 나는 느리고, 자주 아프고, 사회성이 부족해 학교생활도 평탄치가 않았다.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씩 푸욱- 내쉬는 엄마의 한숨소리와 잘 챙겨주면서도 늘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있는 가족들의 태도 속에서 난 늘 위축되었다.
늦은밤까지 맞벌이를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부에게 나는 늘 챙겨야할 짐처럼 생각되지는 않을까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난 가족의 민폐구나. 나도 무언가를 잘 해낼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나의 성취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달리기에서 1등을 하고,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해도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우연한 남의 일처럼 시큰둥했다. 어린 마음에 내 노력에 상관 없이 철이없고 불충분한 존재로 여겨지는 게 퍽 속상했다. 나는 가족들의 시선에서 너무 어렸고, 느리고, 모라자고, 답답한 사람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죄스런 마음으로 착한 딸이 되겠다는 다짐과 노력들은 가끔씩 부모와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은 많이 멍들곤 했다. 내가 빠져있는 가족의 모습은, 그러니까 아빠와 엄마, 언니로 이루어진 세식구는 행복하고 단란해 보였다. 나는 그 행복에 금이 가도록 던져진 돌 같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없어져야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내가 가족에게 관심을 받고 자랑거리가 된 계기는 의외의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대부흥성회가 열렸다. 나는 새벽 집회까지 꼬박꼬박 참석했다. 부모님과 함께 늘 맨 앞자리를 지켰던 나는 3일 내내 이유모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 때였다. 주강사가 뜬금없이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이 아이는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사람이라고, 100명 중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한 영적으로 매우 민감한 아이라고, 하나님이 분명히 크게 쓰실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형들에게 무시당하고 아버지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다윗이 왕이 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난 거기에 있는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심장이 뛰었다. ‘신앙’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모부도 크게 감격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 일을 자랑처럼 늘어놓았으니까. 그날의 경험은 내 숨겨진 욕망의 방아쇠(trigger)가 되어 내 인생을 줄곧 따라다녔다.
난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경험을 지나치게 동경했다. 나는 어딘가 비밀스럽고 신비로워, 가만히 있어도 관심을 이끌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조용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통찰력 있는 말을 던져서 샛별처럼 떠오르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럴수록 내 언어는 점점 정직함을 잃었다. 내 아픔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드라마틱하게 전하는 횟수가 늘었다. 통찰로 반짝이는 말을 생각하려고 애면글면 하느라 가끔은 불붙은 토론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어렵고 공허한 말은 늘어가고, 책임질 수 있는 말과 태도는 줄어갔다. 조용하게 빛나는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길 때마다 시기심과 상실감이 커졌다.
한편으로는 특별함에 집착했다. 나 자신이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다른 이의 특별함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남들이 무시하거나 지나치는 것에 몸을 기울이고, 그만의 가치를 찾아주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미처 발화되지 못한 세상의 숨겨진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었다. 이러한 바람은 배제당하는 존재를 향한 연민으로 이어져,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내가 특별해야만 세상과 연결된다고 느끼는 불안한 자아는, 나란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처럼 발견되고 싶은 욕망을 벗지 못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내 목소리를 내려니 자존심이 상하고, 대신 누군가 먼저 나를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이 마음은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여지만 주며 관계를 조종하고 농락하는 죄를 낳았다.
나를 짝사랑하는 이와 관계의 책임을 분담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내 곁을 맴도는 한 사람의 사랑을 남에게 주자니 아까웠다. 나의 가치는 내게 매달리는 이들의 사랑과 비례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내가 필요할 때에는 상대를 찾으면서도, 지난 사랑의 상처가 커서 너를 잡을 수 없다는 대사를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내뱉었다. 내 옆에 남겨둘 뿐, 나를 떠나지도 잡지도 못하게 만드는 전략을 고수했다. 그러다 지쳐버린 몇 명의 ‘그’들에게 증오만 남기고 끝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반면, 나의 비밀스런 내면을 헤아리고 만져줄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지나치게 나를 드러냈다. 깊이 의지하다 이용당하기도 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내 특별함을 알아줄 사람에게 목을 매다 무너지길 반복했던 지난 시절이 가엾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중요한 사람, 가만히 있어도 사랑받는 존재이고 싶은, 수동성으로 가려진 애정의 깊은 갈망. 이 덫에서 나는 얼마만큼 떨어져 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