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짧은 가을이 더 짧아진 어제, 어둡고 추운 새벽이었다. 6시 20분 도착을 목표로 새벽 5시 40분에는 길을 나서야 했다. 감사하게도 안드레아(남편)가 이날도 차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장난으로 '버릇 나빠지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막상 내가 북클럽 하러 가는 날이 되니 스스로 일어나 준비를 한다. 이 일정만 아니면 그가 5시에 일어날 필요도 없고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다행히도 서울대 호암관으로 가는 길은 크게 밀리지는 않았다. 주차장 도착 시간을 보니 6시 17분.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부랴부랴 모임 장소로 올라갔고 직원분께서 명찰과 자리 세팅 등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계단을 오르며 차 안에서 안드레아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리더는 성격도 특이하고 직원들과 동료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때때로 세상은 그런 소수에 의해 바뀌기도 했다'라고. 천재라고 인간성까지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주변인은 대립하고 피곤했을 테지만 아이디어에 집중한 소수 덕분에 대중이 혜택을 받는 역사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토머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파블로 피카소, 리처드 파인만, 간디 등등. 홀에서 하나 둘 입장하는 회원들을 보며 자신의 시간을 쪼개 오는 분들의 태도와 책임감만큼은 꼭 배우고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당간당하게 책을 읽고 와서 피곤했다. 하지만 18년째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를 써 오신 김난도 작가님을 뵙고 직접 강연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숨도 쉬지 않고 물 한 모금 드시는 일 없이 책의 내용(출간 한 달 남짓한)을 훑어주셨다. 보통 시간 제약 때문에 저서의 반도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번 모임은 달랐다. 작가님은 엔비디아의 사장 젠슨 황과 동갑이라고 하셨는데도 웬만한 젊은이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건강해 보이셨다. 공부만 하셨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넉살을 피우는 듯한 농담과 날카로운 통찰을 섞어 부드러운 어투로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매력도 있었다.
올해 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26』이 기존의 17권의 트렌드 코리아와 전혀 다른 포인트가 있다고 하셨다. 역시 AI 때문이다. 강연 초반에 이 책을 완성 과정을 언급해 주셨다. 백 명이 넘는 봉사자와 15여 명의 박사급 제자가 그 해의 키워드를 조사하고 토론해서 열 개를 뽑고 연구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수의 지성인의 통찰을 바탕으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이 담긴 책이라 불릴 만했다.
이 책의 주제는 한 마디로 'AI와 인간의 변증법적 합일'을 기반으로 한다. 헤겔이 정반합(正反合)의 논리를 폈듯, AI가 정이라면 인간은 반이며 이 둘의 합이 바로 '휴먼인더루프'다. 10가지 키워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강조하셨다. AI 호황 초기에 사람들은 흔히 AI의 사용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여러 실험과 관찰을 통해 내린 지금까지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인공지능 사용 여부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인공지능을 제대로 이용하는 사람이 AI를 잘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다. 일을 원래 잘하고 현명한 사람이 AI를 도구로 이용할 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다.
작가님 또한 다른 연사분처럼 키워드와 관련해서 책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작가님의 친구 중 일부는 이렇게 많은 트렌드를 매년 꼭 익히고 따라가야 하냐고 힘들어하셨다고 한다. 이에 어떤 대답이 오갔을까?
"다 따라가지 않아도 돼. 그냥 살던 대로 살아. 나도 100% 디지털과 AI, 트렌드를 따라 살지는 않거든. 여전히 노트에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고 종이책의 물성을 느끼며 독서하는 걸 더 좋아해. 단, 그대가 돈을 벌고자 한다면, 대중이 뭘 좋아하고 세상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는 알아야겠지."
솔직한 대답이면서 새겨들을 만한 말씀이라 여겼다. 회원 대부분이 CEO 출신이 많으니 작가님은 아무래도 경제적 관점에서 주로 다루셨지만 나는 인간관계에서도 적용할 만하다고 본다. 특히 픽셀라이프나 1.5세대, 레디코어를 다룬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의 핵심은 변화이자 현대인, 특히 젊은 세대의 인식과 생활이다. 영화 <기생충>의 유명한 대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에서처럼 '트렌드 코리아'는 잘파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살아갈 영감을 주었다.
그 밖에 다룬 계획과 불안, 기대 및 근본을 향한 회귀 또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통로가 될 테니. 책을 다 읽고 저자의 의도와 통찰을 듣고 나니 이해의 폭이 좀 더 넓어짐을 느낀다. 가끔 아이들을 보면서 서로 다른 우주를 사는 듯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작가님 말씀처럼 갈등이든, 변화든, 불안한 미래든 AI가 아닌 사람의 손에 주어진 열쇠로 풀 수 있을 테니까.
김난도 작가님이 내린 저서의 핵심 대가 아직도 윤슬처럼 마음을 울린다.
"'트렌드 코리아'는 변화에 대한 연구이며, 또한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에 대한 연구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