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서울>을 보고
"글 잘 쓰는 작가 참 많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폭싹 속았수다>(아래 '폭싹') 이후로 한동안 볼 만한 드라마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폭싹'이 끝나고 석 달도 되지 않아 그에 못지않은 드라마와 마주했다. <미지의 서울>.
<미지의 서울>은 '폭싹'과 결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드라마다. '가족'이란 무너지는 구성원의 손을 끝끝내 놓지 않고 곁에서 지켜내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그렇고, '삶'이란 닫힌 문 앞에서도 문고리를 돌릴 용기를 내기만 하면 또 다른 세상을 선물로 안겨준다고 말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미지'와 '미래'라는 일란성쌍둥이가 역할을 바꿔 지내는 동안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를 각을 잡고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상월의 바다'라는 시가 등장하는 3화부터였다.
"반짝임에 열광하던 그이들 / 어디로 갔나 / 불빛 토하던 여름의 폭죽 / 어느새 모래 속에 / 식어버리고 // 그 많던 / 사람들 다 / 어디로 갔나 / 발자국도 사라진 싸늘한 / 모래밭 갈 데 없는 나만 / 우두커니 혼자 남아 / 신발 잃은 / 아이처럼 나 혼자 / 서성이네 맨발이 / 돼버린 나 / 이제 돌아갈 곳 없는데 / 소라고둥 귀에 대면 / 아직도 귀에 선한 폭죽 소리 / 파도에 섞여 와 / 조금 더 들으려 소라고둥 속으로 / 소라고둥 속으로 / 어느새 동굴 속 갇힌 나 / 눈물이 만든 파도 소리에 / 서릿달만 문 두드리네 / 이제 그만 나와 봐 / 불꽃 진 자리에 별이 가득해"
미지의 회상 장면과 함께 흐르는 '상월의 바다'라는 시를 들으며 드라마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인물은 로사와 상월이었다. 내게 둘은 이강 작가가 심어 놓은 또 다른 쌍둥이처럼 보였다(10화에서 사진관의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그들에게 무슨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로사가 '쌍둥이'라고 답하기도 한다). 미지와 미래가 생김새가 같음에도 서로를 전혀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관계로 보였다면 로사와 상월은 생김새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읽는데 온 생을 바친 관계로 보였기 때문이다. 둘은 상반된 역할의 쌍둥이라고나 할까.
이강 작가는 미지와 미래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한 화(10화)를 몽땅 로사와 상월의 사연으로 채웠다. 그래서일까. 내게 10화는 작가가 시청자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둘이지만 하나로 살아가는 로사와 상월을 통해 인간은 단독의 존재가 아님을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를 읽어줄 누군가와 누군가를 읽어줄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런 점에서 10화의 제목(당신을 읽는 시간)은 내게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로도 보였다.
<미지의 서울>은 총 12화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화는 소제목을 달고 전개되는데 이야기는 소제목을 잘 구현하고 있어서 따로 떼어 내어 보아도 울림이 크다. 아마도 보는 이에 따라 인상 깊은 화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내게는 10화가 각별했다.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랬고, 무엇보다 로사의 유서가 등장해서도 그랬다. 로사가 상월을 위해 남긴 유서는 하나의 문학서 같아서 내게는 무척 아름답게 다가왔다. 유서의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상월이가 비밀을 터놓을 사람을 만났거나 이걸 내밀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는 뜻이겠지요. 부디 당신이 아주 마음씨 좋은 사람이길 바랍니다. 인생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볼 땐 불가해한 암호 같지만 이해해 보리란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지요. 나와 상월이를 한 단어로 담아보려 평생 애썼지만 모두 어딘지 넘치거나 모자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허나 현상월이 어떤 사람인지는 세 글자로도 담을 수 있어요. 김로사. 나쁜 건 모두 자기가 갖고 제겐 좋은 것만 주려던 바보같이 착한 마음씨가 제 이름 석 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밖이 모질고 추워 잠시 제 주머니에 맡아 뒀지만 제 이름으로 된 모든 건 온전히 상월이 거예요. 그러니 이제 거짓말을 끝내고 상월이가 자신의 것들을 되찾길 바랍니다. 부디 이 외롭고 다정한 아이를 시를 읽는 마음으로 바라봐 주세요."
우리 모두에게는 시를 읽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드라마. 이 드라마를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https://youtu.be/aKHy9iBHujQ?si=hZdm-xfRVrcrt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