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택시 운전사에 관한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기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핸들"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2025년 4월 출간).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여서일까. 소설을 읽는 동안 마치 내가 손님을 기다리고, 선택하고, 맞이하고, 관찰하고, 대화를 이어가다 마침내 손님과 작별하는 듯했다. 핸들의 주인은 손님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닌 것도 아님을 암시하는 풍경.
그런 와중에 책에서 영화 한 편과 시인 한 명을 만났다. 마이클 만 감독의 <콜래트럴>과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책을 읽다 말고 넷플릭스에 들어가 영화를 찾았다. 혹시나 했는데 마침 목록에 올라 있다. 2004년작인 영화는 살인 청부업자가 택시기사를 인질로 삼아 자신의 임무를 처리하는 내용이었는데 톰 크루즈가 살인 청부업자 빈센트로 등장해 의외였다.
영화는 철학적 사유에 살짝 힘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살인 청부업자 빈센트의 비극적인 삶이 안타까워 여운이 길었다. 첫 범죄가 발각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스스로를 용서했더라면 어땠을까, 타인의 비극에 공감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빈센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소설 속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소제목의 각주에서 만났다. 알고 보니 시인은 10여 년 전에 읽은 공선옥 작가의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가장 예쁠 시기 스무 살에 엄혹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에서 당시에는 제목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때는 무심코 지나친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이름이 이번에는 마음에 콕, 와서 박혔다. 덕분에 시인의 이력과 시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윤동주 시인에게 반해 한글을 배우고, 한국 문학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일본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인용한 수필 '한글로의 여행'은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데,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시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와 '자기 감수성 정도는' 두 편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 엉뚱한 곳에서 /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오래 살자고 / 나이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 프랑스 루오 할아버지처럼 / 그렇게"(시집 <처음 가는 마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시를 읽으니 삶의 비극성에도 꿋꿋하게 삶을 살아내겠다 다짐하는 내용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래, 인간은 그런 존재이지. 어떤 비극에도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이지. 비극적인 사건이 예쁨을 앗아가더라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이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에서 보여준 다짐처럼 시인은 80세(1926~2006)까지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채 시인으로서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 남 탓하지 마라 /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 서먹해진 사이를 / 친구 탓하지 마라 /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 일이 안 풀리는 걸 / 친척 탓하지 마라 /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 초심을 잃어가는 걸 / 생계 탓하지 마라 /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 틀어진 모든 것을 / 시대 탓하지 마라 /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 자기 감수성 정도는 / 스스로 지켜라 / 이 바보야"(시집 <처음 가는 마음>, '자기 감수성 정도는' 전문)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키라는 시인의 일갈이 머리를 때린다.
세상 모든 것은 발견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설 "핸들"을 읽기 전까지 '빈센트'와 '이바라기 노리코'와 대리기사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세상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