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2학년 아이를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 쑥스러움을 드러내던 아이는 이제는 만나면 반색하는 표정을 얼굴에서 감추지 않는다. 덕분에 처음 만나던 날, "손을 잡고 걸을까?"라고 조심스럽게 건넸던 내 말투도 이제 "손잡자~"라는 호기로운 말투로 바뀌었다.
'시터 이모' 활동은 영어학원에서 아이를 하원시키는 일부터 시작이다. 학원 건물에서 나와 아이 손을 잡고 학원 앞 신호등을 건너면 아이와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나타난다. 우리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건 이 시점부터다. 아이도 나도 차가 연신 지나가고 사람의 발길이 바쁜 지역을 벗어난 것에 안도하는 걸 게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와 집까지 홀로 걸어오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와 아파트 놀이터에서 한참을 놀고 들어오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동네 골목에서 해가 저물도록 놀다가 "밥 먹어라!"라는 고함 소리에 뿔뿔이 흩어지던 그 이전 풍경과도 다른 모습이다.
혼자 집까지 가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아이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는 학교도 혼자 등교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이는 태어나 지금까지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외동이고 '안전'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이니 당연한 듯도 하다.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은 5분 남짓이다. 그 5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아이와 함께 풀과 나무를 바라본다. 더위와 함께 왕성하게 초록을 자랑하던 비비추가 누렇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파랗던 단풍나무 씨앗이 빨갛게 변해가는 걸 보고, 감나무에 달린 감이 점점 주황으로 변하며 몸통을 키우는 것을 보고, 늘씬하게 하늘을 향해 뻗은 메타세쿼이아 몸피에서 검은 이끼가 자라나는 풍경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본다.
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아이는 나무의 이름을 낮게 읊조린다. 모든 식물에는 사람들이 약속해 붙인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뒤의 변화다. 아이는 집으로 가는 동안 틈틈이 알려준 식물의 이름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읊조린다. 처음 알려준 비비추부터, 기억하는 데 며칠이 걸린 메타세쿼이아까지.
매일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면서도 아이와 나는 풍경을 새삼스럽게 맞는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사소한 변화에 눈을 맞추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꿈틀대는 지렁이를 발견해 화들짝 놀라고, 어느 날은 구멍 속으로 부지런히 먹이를 실어 나르는 개미의 행렬을 발견해 바라보고, 어느 날은 빨갛게 영근 나무 씨앗에 손을 대었다가 끈적임에 놀라고, 어느 날은 바람에 떨어지는 단풍 씨앗을 주워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리고, 어느 날은 잎새를 몽땅 잃어버린 회양목을 대머리라 놀리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아이와 나는 서로의 반응에 추임새를 넣으며 길을 걷는다. 탄성과 웃음으로 충만한 시간. 충만한 5분이 평일 오후 5시마다 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