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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by na지윤서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한 숲길에 들어서자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게서 말로만 듣던 메타세쿼이아 숲이 아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이었다.


자신의 키보다 수십 배는 커 보이는 나무를 올려다보는 아이 곁에서 나는 아이를 따라 자세를 낮춰 앉았다. 아이의 시선을 사진에 담고 싶어서였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메타세쿼이아는 그야말로 장엄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놓았던 아이의 손을 다시 잡고 걸음을 내디뎠다. 여느 때처럼 아이는 내 발길을 흘깃 보고는 같은 쪽 발을 내밀어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아이 걸음에 맞춰 보폭을 좁혔다. 암묵적으로 익숙해진 발걸음이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아이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잣나무 숲을 지난 후 나타난 메타세쿼이아 숲이 꽤 길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멀지 않았다고 답했다. 마침 목적지인 '숲속무대'가 정말로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대문이음길'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숲속무대'가 나타났다. 아이는 그곳으로 들어서자 두 팔을 활짝 펼치고는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광장처럼 넓게 펼쳐진 공간이 무척이나 자유롭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장소를 바라보며 아이에게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했다. 아이는 테이블 없이 의자만 놓인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를 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아이와 조금 떨어져 앉은 후 가방에서 물티슈, 음료, 간식을 꺼내 아이 곁에 놓았다. 건네준 물티슈로 손을 야무지게 닦은 아이는 평소에 즐기는 쌀과자 대신 초콜릿에 먼저 손을 뻗었다. 소금이 들어간 초콜릿이라는 설명을 오는 길에 들었던지라 맛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는 앉은자리에서 세 개를 먹어치웠다. 더 먹으려는 아이에게 안 된다며 쌀과자와 쿠키를 내밀었다.


"산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아이는 쌀과자를 씹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정말. 산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네."


나도 쌀과자를 씹으며 메아리처럼 아이 말을 따라 했다.


아이와 함께 하늘로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숲으로 바람이 불었다. 아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무가 움직여요."

아이가 가리킨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어린 메타세쿼이아였다. 몸통을 채 불리지 못한 어린 나무 여러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는 좌우로 제법 강하게 일렁이는 나무를 보더니 과자를 손에 꼭 쥔 채 어깨를 움츠렸다. 아마도 바람 때문이 아니라 나무가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해 무서움이 드는 모양이었다.


"나무가 저절로 움직이는 거 같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몸통이 굵은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가 아직 어려서 바람에 흔들리는 거야. 저 나무처럼 굵어지면 흔들리지 않아."


몸통이 굵은 나무는 몸통이 가는 나무와 달리 잎새만 팔랑이며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이는 몸통이 굵은 나무와 몸통이 가는 나무를 번갈아보더니 어깨를 폈다. 나머지 과자도 마저 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내려가는 길에 낙엽을 줍자고 말했다. 유치원 때 산에 갔는데 낙엽 줍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며 산에 가면 낙엽을 줍겠다던 아이 말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아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밀물처럼 어둠이 밀려들었다. 황톳길을 밝힌 따스한 온기를 내뿜는 노란 등불을 뒤로하고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내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던 올 때와는 달리 흥이 오른 아이 모습에 나름 흡족한 산행이었나 보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나 역시 아이에게 약속했던 메타세쿼이아 숲을 보여 줄 수 있어 흡족한 산행이었다.


아이를 만나고 한 달쯤 되었을 때, 금요일에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위가 물러나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아이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보여주고 싶은 장소들이 생겨서였다(금요일에는 아이를 한 시간 일찍 만나는 덕분이기도 하다).


다행히 아이 부모는 금요일 나들이를 반색하며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부모에게 나는 '저도 즐거워하는 나들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까지도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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