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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을 때, 갈 수 있을 때

10월 중순의 이탈리아 아말피 코스트

by 이지윤

어렵게 스케줄을 조정해 오랜만에 다시 찾은 에르끼에. 수요일 오후에 도착해 토요일 일출 전에 다시 떠나야 하니 내게는 꼭 세 밤이 있을 뿐이다.


짧은 일정인데 비 올 확률이 백 프로라는 일기예보가 야속하다. 일기 예보는 언제나 비관적이라는 말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번 일기예보는 어쩜 딱 들어맞았다.

에르끼에 도착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밤이 새도록 굵은 비가 사납게도 내렸으니까.


삼일째 아침,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까? 언제 굵은 비가 내렸냐는 듯 날이 개었다. 떠나기 전 오늘이 유일하게 바다에서 해가 뜨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날! 맨발로 급히 해변이 보이는 발코니로 나섰다. 간밤, 자정이 넘도록 친구들과 늦은 저녁 식사가 이어진 탓에 피곤하고 시린 눈을 비비고 해변을 바라본다.


아말피 코스트에 숨겨진 작은 마을 에르끼에. 시월 중순의 아침 기온은 17도다.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타고 내려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는 더 낮게 느껴진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해변으로 나가야지.’ 바다 수영을 하기엔 이른 시간이다.


어? 그런데 벌써 해변에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아니, 누가 손녀라고 그랬나, 딸일지도 모른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풍덩 찬바다에 몸을 던진다. ‘우와!’하고 입이 벌어진다.


높은 발코니에서 저 멀리 넓게 펼쳐진 해변을 보고 있자니 마치 파도 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자연음만 배경으로 삼는 무언극을 보는 기분이다. 동쪽 탑 머리 너머로 붉은 해가 이글거리며 솟아오르고, 서쪽 해안 끝부터 햇살이 대지를 데운다.

아침 일찍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시키는 남자, 해맞이를 나와 모닝 키스를 하는 젊은 남녀, 동쪽과 서쪽 해변 가운데 지점에서 낚시 준비를 하는 남자, 해변 위에서 조깅을 하고 몸을 데운 뒤 풍덩 물에 뛰어드는 남자, 조용히 해안선을 바라보며 가부좌를 하고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가 싶다가 어느새 파도를 베개 삼아 물결 위에 몸을 맡긴 여자. 어느덧 낚시꾼은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

다양한 역할의 등장인물이 차례를 바꿔가며 부산스럽지 않게 순서대로 해안 무대를 채운다.


그들이 가진 단 하나의 공통점. 할 수 있을 때, 기회가 될 때, 아무리 짧은 순간도 아쉬워하지 않고 최대한 즐긴다는 것.


한 친구가 그랬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갈 수 있을 때 가는 게 맞는 거겠지?"

"응?”

"어디론가 가고 싶을 때, 언제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생각해 보니 삶 전반의 모든 일이 그랬던 것 같아."


언제나 할 수 있으니까라고 믿고 미루었던 일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지금 하는 거다.


친구와의 대화 후 바로 에르끼에 행 표를 끊었다. 벼락치기 숙제하듯 항상 바쁘고 숨 가쁘게 달려온 날들. 시간이 멈춰진 이 작은 마을에서는 한숨 쉬어 가려고.




2022년 10월 12일 (수)~ 15일 (토)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 코스트, 에르끼에 Erchie에서


사진: 이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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