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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행 야간열차

by 이지윤

가장 마지막에 기차를 탄 게 언제였던가? 아마 작년 9월 말 피렌체를 갈 때였나 보다.


지금이야 큰 고민 없이 빠르고 쾌적한 트렌 이탈리아 프레챠 로싸(Trenitalia Freccia Rossa) 혹은 이탈로 쁘리모 클라쎄 (Italo Primo Classe)를 선택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막 도착했을 때는 기차표 하나를 살 때도 여러 번 가격 비교를 하고 샀다.


당시 이탈리아 말이라고는 몇 마디만 겨우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저는 이탈리아 말을 못 합니다” (“Buongiorno”, “Grazie”, “Non parlo l’italiano”).


막 타국에 떨어져 언어적으로 벙어리에 귀머거리, 까막눈이 된 터라 경제 활동은 빛이 보이지 않는 먼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아둔 돈을 광의 곶감 빼먹듯이 탕진하지 않으려니 나의 살 길란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기. 나는 이변 없는 2등석 승객이었다.


가장 자주 하던 기차 여행의 목적지는 한국에서 친구들이 올 때 꼭 들리고, 대한민국 영사관이 있는 밀라노(Milano), 그다음은 친구네가 있는 아말피 해안과 가장 가까운 살레르노(Salerno)였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토리노에서 밀라노를 갈 때는 느려 터진 트렌 이탈리아 레죠날레 (Trenitalia Regionale) 2등석을 타도 두 시간이 채 못 되면 목적지에 도착하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서부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까지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동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주머니 얇은 내겐 기찻표값도 만만치가 않았다.


시간 낭비도 줄이고 가격도 합리적인 대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토리노에서 밤에 출발해 아침이면 살레르노 역에 도착하는 야간기차였다. 딱딱한 플라스틱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이동을 하니 아침이 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곤 했지만, 애써 잠을 청하고 일어나면 아말피 바다가 날 반긴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여름이었던가? 그 잊을 수 없는 모험을 한 밤이…….

한 번은 남부에서 북부로 돌아오는 야간 침대 열차가 만석이었다. 다른 기차나 비행기 편은 여름 극성수기라 가격이 아찔하기만 했다. 나는 고민을 하다 고정된 침대 대신 소파 의자를 침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파 자리를 예약했다. ‘과연 그 긴 시간을 앉아서 이동하는 일이 잘하는 일일까?’ 싶었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트렌이탈리아 야간열차 침대칸은 잠금장치가 있는 객실 한 칸 안 양쪽 벽에 2층 침대가 붙어 있으니 최대 총 4인실이다. 그런데 소파 객실은 한 칸에 6인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더구나 슬라이딩 도어는 잠금장치가 고장이 나 기차가 세게 달릴 때나 멈추었다 다시 달릴 때면 어김없이 슬쩍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문 앞의 승객은 꼼짝없이 문지기 노릇을 해야 했다. 더구나 침대칸 객실과는 달리 불도 끌 수가 없었다. ‘이 밤이 어서 끝났으면…….’ 토리노에 어서 빨리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내 바람과는 달리 살레르노 역에서 출발한 야간열차는 어두운 나폴리 역에서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 이건 꿈일 거야.’

창밖이 갑자기 전쟁이 난 듯 시끌시끌 어수선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풍경이다. 물, 빠니노, 휴대용 티슈, 라이터 등을 팔아보겠다고 불법 행상들이 기차로 올라타는 것이다.

“나도 남부 출신이지만, 로마 아래로는 여행 가지 마! 무서운 곳이라구!” 남부 출신 조반니의 조언이 떠올랐다. 덕분에 거침없이 기차로 올라오는 행상들이 마치 좀비 떼처럼 위협적으로 보였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보다. 내 앞에 앉은 노란 머리, 푸른 눈의 외국인 커플은 큰 눈이 더 커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금발 머리 여자는 짐에서 얇은 머플러를 꺼내고, 파란 눈의 남자는 잠금장치가 고장 나 잠기지 않던 우리 칸 문 손잡이를 머플러로 묶어 고정했다.

밖에선 행상들이 연신 문을 열겠다고 덜컹덜컹 문 손잡이를 밀어댔다. 얇은 여름 머플러로 고정한 문이 열릴 듯 말 듯 덜컹거릴 때마다 간이 철렁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기차는 나폴리 역을 천천히 벗어났다. 백인 커플의 눈이 휴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야간열차는 돈도 시간도 아끼기 딱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남부 도착. 얼마나 좋은가?


그 한여름 야간열차의 악몽 이후 내 형편이 나아졌었는지, 아니면 내 얇은 주머니 사정보다 그 악몽이 끔찍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다시는 야간 기차를 탄 기억이 없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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