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놀란 건 겨울에도 어디나 들판이 푸르다는 거였어요. 한국에서 푸른 들판은 봄이 되어야 볼 수 있었는데 말이죠.
이곳은 해만 뜨면 햇살이 굉장해서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는데, 구름이 끼면 또 확 추워져요. 어젠 딱 하루 해가 비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벽난로 켜고 싶은 그런 온통 음울한 날씨네요.
오늘부터 무려 다음 주 목요일까지 해를 못 본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이곳 북서부 이탈리아에서는 해만 나면 진짜 어디든 막 떠나고 싶은 그런 심정이 들어요. 날씨에 따라 막 기분이 왔다 갔다 한답니다.
몇 주 전 주말엔 계속 비가 오고 날씨가 음울해서 지도와 지역별 일기 예보를 보다 해가 비치는 곳을 찾아 두 시간을 넘게 운전해서 해를 보고 왔답니다. 너무 웃기죠?
며칠 전엔 말이죠,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해도 났는데 아침부터 머리가 너무 아프고, 일은 진창으로 쌓여 있고, 다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온 세상에 저 혼자인 것 같았어요.
점심도 거르고 아침부터 쌓인 일을 해치우고 나서는 차를 타고 그냥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했어요. 그냥 다 싫더라구요.
그렇게 휭 나가서는 제가 고작 뭘 하려고 했는지 아세요? 레스토랑에 필요한 감자 사는 거랑 신발 수선 맡긴 거 찾으러 가는 거였어요. 세상에……. 진짜 난 세상에 혼자구나. 레스토랑 일을 접게 된다면 내 인생은 뭐지?
그런데 그 짧은 일탈마저 순조롭지 않았어요. 농부가 직접 운영하는 작은 채소 가게는 문을 닫았고, 신발 수선집도 점심시간이라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다시 연다고 쓰여 있었죠. 아, 점심시간이지. 제가 점심을 거른다고 온 세상이 점심을 같이 거르는 게 아니었어요.
할 수 없이 평소에는 지나다니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아주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어요. 정말 다섯 걸음이면 공간이 끝나는 아주 작은 커피숍이었는데, 너무 작아서 주인이 그 공간 안에 있다는 것 마저 불편하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었어요. 인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거리가 침해되는 엘리베이터 안에 어색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달까요?
오랜만에 카푸치노가 아니라 커피를 시켰어요. 이탈리아 인들이 구정물이라며 눈을 찌푸리는 아메리카노 말이죠. 큰 커피 잔에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뜨거운 물을 따로 부탁했죠. 커피 농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해서 마시려구요.
큰 커피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쪼르륵 조금 따랐어요. 그리고 커피 한 모금을 아주 조금 들이켰어요. 그런데, 갑자기 신세계가 펼쳐졌어요. 갑자기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커피의 맛과 향이 아주 다층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한동안 아무것도 맛있다 흥미 있다 이런 걸 못 느끼고 살았거든요. 아무것도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커피 한 잔이 감각을 깨웠어요. 고작 커피 몇 모금이 말이죠. 이런 건가 정말? 이렇게 쉽게? 그 작은 커피숍에서 혼자 홀짝거린 커피 몇 모금이 주는 행복이 아주 크다는 걸 느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사치. 그걸 제가 누린 셈이네요.
그냥 그렇게 순간만 살 수 있는 건데, 너무 멀리 보고, 너무 많은 걸 계획하고, 너무 크게 좌절하고, 너무 심하게 걱정하면서 정작 커피 한 모금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군요.
그 작은 커피숍. 가끔 다시 찾을까 봐요.
사진: 이지윤
<caffè Italia> Corso Italia, 6, Alba, CN, It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