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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학교에서

by 이지윤

하루가 너무 짧다. 침대에 금방 몸을 기댄 듯한데, 총알처럼 다가오는 아침이 야속하다. 피곤에 절은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친구들과 식탁에 다 같이 빙 둘러앉아 커피, 차, 우유에 탄 오르조, 버터와 꿀, 온갖 종류의 마멀레이드를 바른 빵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아말피 해안가의 아침 풍경이 그립다. 이탈리아 남부식 아침의 여유는 토리노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벌써 먼 나라 이야기다.


급히 씻고 집을 나섰다. 간밤에 길 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길이 미끄럽다. 뛰지도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걷다 보니 학교 첫 수업에 이미 십여 분 늦었다.


아침 여덟 시 반부터 네 시간 내내 액자에 바른 볼로냐 석고에 사포질을 하고 곱게 결이 정리된 석고 위에 토끼 가죽 풀을 발랐다. 볼로도 그 위에 발라야 하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 후엔 세 시간 안에 볼로를 바르고 색이 벗겨진 부분에 색도 칠해야 한다.

하루 종일 오롯이 액자 무늬만 바라봤다. 사포질을 하는 동안 미세한 석고 가루가 눈에 들어갔나 보다. 눈이 뻑뻑하고 무겁다. 한참 눈을 감았다가 물끄러미 바닥을 봤다. 신발은 온통 새하얀 석고 가루로 덮여 부옇다.


경기 불황을 고미술 복원만 피해 갈 순 없다. 학교 졸업 후 만 서른다섯까지는 학교 주선 인턴 기회가 있다고 했던가? 나는 서른다섯이 넘은 말 서툰 외국인. 밑그림도 청사진도 없다. 매일 여덟 시간씩 뻑뻑한 눈을 애써 부릅뜨며 석고 사포질이며 금박 복원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석고 가루 부연 뒤축 닳은 신발을 신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2016년 1월 9일



2016년의 저는 토리노에서 고미술 복원을 공부하고 있었군요.

이탈리아 인 같지 않게 하나같이 경쟁이 심하던 학생들, 교실 가득한 아세톤 냄새며 토끼 가죽 풀 냄새로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오던 실습실이 떠오릅니다.

지긋지긋한 두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지도요.

멀리 보이지 않는 안개 낀 길에선 그저 반 발짝이라도 계속 내딛을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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