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성 난청 일지 6
‘Overtourism’, 심하다 심하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인파가 비늘처럼 길을 덮어 길이 보이지 않을 지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중앙역에 기차를 타고 도착한 우리. 중심가에 숙소를 잡았다 해도 선택은 없다. 어차피 택시는 오지 않는다. 꼼짝없이 기차역에서부터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덜덜거리며 캐리어를 끌었다. 이 정도면 손목이 나가도 당연한 상황. 그렇지 않아도 덜덜거리는 길이 인파에 밀리니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9월 말 밝은 햇살이 반갑기는커녕 짜증스러울 수밖에.
거대한 사람들의 물결, 얼마나 주춤하다 걷고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을까? 울퉁불퉁 턱이 많은 역사 지구,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며 걷다 보니 손목이 ‘그냥 날 잡아드셔!’ 비명을 외칠 즈음 숙소에 도착했다.
오, 이런! 제발 기억하자! 이탈리아에서 호텔 앞에 ‘부티크’라는 말이 붙었다면, 어쩌면 그건 ‘어설픈 혹은 살짝 모자란, 그러나 만만치 않은 금액의’ 란 뜻일지도 모르니까.
친구 커플이 ‘넌 바쁘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게’라고 했던 호텔이다. 5성급 호텔 가격이지만 화장실엔 창문도 없다.
중앙 기차역부터 숙소까지 고생한 놀란 손목과 발바닥에 호텔 가격의 충격이 더해지고 나니 피곤이 더해온다. 우선은 다 필요 없다. 땀 찬 긴 바지부터 벗고 벌렁 누웠다.
‘오~ 침대여, 그대야말로 나의 친구로다!’ 꿀 같은 잠깐의 휴식.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나, 나는 인간, 사회적 동물인 것을. 로비에서 기다린다는 은퇴 커플의 독촉 문자를 받고야 말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할 줄 몰랐던 반바지로 갈아입고 호텔 문을 나섰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기엔 이미 늦은 시간. 재고 따지고 할 수가 있나? 그냥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문 연 곳이면 감지덕지. 그야말로 눈 뜨고도 코 베어 갈 관광객 전용 식당 앞 테이블에 앉았다. 오후 세 시가 가까운 시간 테이블에 앉게 해 주는 게 어딘가? 이유불문 품질불문 그저 그 지역 하우스 와인 한 잔에 파스타 한 접시면 감지덕지다.
계속 테이블 주변을 맴돌던 집시 할머니에게 몇 유로까지 건넸으니 겪을 수 있는 모든 역경은 끝났다. “그렇게 못 삼킬 정도는 아니다, 그치?” 애써 서로를 위로하며 포크질을 하던 그때, 나는 여행 동지들에게 폭탄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 미안하지만, 나 꼭 할 일이 있어. 저녁 식사 예약이 몇 시라고 했지? 거기서 보자.”
“응? 뭐라고? 왜????”
의외로 일행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런, 참……. 원……. 시시콜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희는 이해를 못 하겠지만, 몇 년 전 갑자기 오른쪽 귀가 먹었어. 어제 잠을 거의 못 잔 데다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 고속 열차 안에서 터널 지날 때부터 왼쪽 귀마저 저세상 갈 기미가 보여. 이 짧은 피렌체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지만, 내 소중한 왼쪽 귀도 지켜야 되겠다. 나 응급실 갈게. 나중에 봐, 안녕.”
쿨하기만 했던 이 은퇴 커플, 정말 왜 사람을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까? 굳~~~~ 이, 굳이 따라오겠단다. 아놔! 왜! 왜애애애애? 사람 괜히 마음 불편하게! 어디? 이탈리아에서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 바로 응급실이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응급실. 피렌체까지 와서 이 귀한 시간 기껏 응급실이라니.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서도 침이 마르게 그네들을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 “아놔! 어차피 너희가 도움 될 일이 없어. 제발 가 줘.” 이놈의 여행 동지란 작자들이 나처럼 양쪽 귀가 모두 갑자기 먹은 걸까? 도무지 사람 말을 알아듣질 않는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던 때, 누군가 내 성을 부른다.
“씨뇨리나 리 Signorina Lee” 오!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 차례!
1차 상담을 한 의사도 내 케이스는 처음인 듯. 그런데 다행이다. 귀가 유연한 의사들이다. 청력 이상 후 모든 자료 사진을 휴대폰 폴더로 모아두길 잘했다.
“한쪽 귀에 급성 난청이 온 사람은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대요.” 3년 전 토리노의 고압산소 치료 클리닉 탈의실, 순면 옷으로 갈아입으며 환우들과 카더라 담화를 나눈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90 퍼센트 청력을 회복했다는 유일한 환우의 경험담, “주치의를 잘 만났지 뭐예요? 응급실로 가서 아주 독한 코르티존 링거를 맞으라고 처방을 내려줬어요. 그리고 바로 이 고압 산소 벙커 치료를 시작했어요. 3일 후 바로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 났어요.”
다 필요 없다, 나는 무조건 이 경험 적은 의사를 설득해야 했다. ‘고용량의 코르티존 링거!!!!’
운이 좋았다고밖에. 내가 만난 그날, 그 타임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병원 응급실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굉장한 인내심과 이해력을 장착한 여의사는 내 바람대로 내 몸무게에 준해 맞을 수 있는 최대 용량의 코르티존 링거를 처방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관광객으로 몸살이 난 피렌체에서 말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물론, 꽁으로 온 행운에게 지구력까지 기대할 수야 있나? 피곤에 절어 틱틱거리며 날 중국인 취급하던 남자 간호사는 이미 행운 보따리 밖. 침대가 부족하다며 날 응급실 복도 의자에 앉게 하더니, 혈관이 보이지 않는다며 손목에 훅 하고 굵은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순간, 뼈까지 시린 느낌이 들었다. 손등에 퍼렇게 멍이 올라올 정도로 고통이 심했지만 이 짧은 시간에 원하던 코르티존 링거를 맞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 그저 감사할 일.
거칠게 찌른 주사 바늘 탓에 붉은 피가 튜브를 타고 거꾸로 흘러나오긴 했지만 얼마간의 코르티존 수액은 분명히 내 몸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린 후 다시 친절한 여의사와 면담, 며칠간의 먹는 코르티존 처방전까지 손에 쥐었으니, 이젠 그저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
별 수 있나? 숙소에서 안정을 취하다 은퇴 커플이 몇 달 전에 아주 어렵게 예약했다는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귀는 좀 어때?’부터 시작해 ‘숙소 방음이 전혀 안 돼’라는 불평까지. 세상의 모든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레스토랑을 나왔다.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도, 쌉싸름한 볶은 치코리아 맛도 훌륭했지만, 하루아침에 완전한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내겐 다 껍데기다.
“호텔이 중심가라 편한데 방이 너무 시끄러워.” “그래? 내 방은 진짜 조용한데. 너희 방 창문이 큰길 쪽으로 났나 봐.” 응급실까지 따라와 미안하던 차지만 듣자 듣자 하니 은근 부아가 치민달까? 난 양쪽 귀 귀머거리가 될 판인데, 어쩌다 방이 시끄럽다는 은퇴 커플 장단을 맞추고 있다.
드디어 다시 숙소로. 화장실 창문이야 있든 말든, 뜨거운 물 샤워를 하고 나니 살 것 같다.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사각거리는 순면 이불보 속으로 몸을 묻었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왼쪽 오른쪽, 다시 여러 번 뒤척이며 모로 눕길 반복하던 차, ‘꾸륵! 꾸꾸륵!’ 막힌 싱크대 뚫리는 느낌이다. 갑자기 창밖의 소음이 와~!!! 하고 귀에 꽂힌다.
‘아! 이랬어야 했어! 3년 전, 내 오른쪽 귀가 멀었을 때도 이랬어야만 했던 거야!’
잃었던 왼쪽 청력을 반나절만에 되찾은 벅찬 기쁨에, 3년 전 갑자기 잃어버린 오른쪽 청력이 아쉬워 눈물이 났다. 싸구려 칵테일에 취해 소리치는 젊은이들, 창밖의 소음이 이렇게 반가울 때가 있었나?
밥을 먹다 갑자기 응급실에 간다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지인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 몸은 내가 지킨다!’
병 앞에서 예의 따위는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잠깐 접어둬도 좋다.
내가,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니까.
사진: 이지윤
2024년 9월 말, 피렌체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 응급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