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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Godot Aug 29. 2024

진혼

진혼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장례식에서 돌아온 나는 꿈을 꿨다.


 문 앞에 서 있었다. 내 오른편으로는 위로 그리고 아래로 뻗어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참이 있었다. 아마도 가짜 대리석이었을 것이다. 혹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있는 힘껏 더러워진 대리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제 깔을 잃은 채 지저분했고, 내 앞에는 문이 있었다. 내 뒤로도 문이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이 문을 바라봐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뒤로 돌았다. 그러나 뒤로 돌아도, 돌지 않은 것처럼 똑같은 문이 그곳에 있었다. 회백색의, 우둘투둘한 철판으로 만들어진, 가볍고 방화에 유리한 전형적인 문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신발 한 켤레가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 뉴발란스에서 만든 주갈색 런닝화였다. 2002이니, 530이니, 327이니 하는 구분은 하지 못했다. 나는 신발에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그정도의 감식안은 없었다. 그러나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나는 그 신발을 많이 봤다. 뒤축까지 뾰족하게 뻗은 밑창의 위로 약간 젖은 듯한 얼룩이 묻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배다리집에서 생긴 자국이라는 사실 역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 중문이 있었다. 중문 너머로는 신음 소리, 두 남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의 소리였다. 나는 다급히 중문을 열었다. 하얀 벽지를 우드 톤의 프레임과 함께 짜넣은 여섯 평 남짓한 방이었다. 그것 역시 익숙한 방이었다. 요셉의 방. 한복판에는 전율과 함께 요셉과 자연이 몸을 섞고 있었다. 요셉이 밑에 있었고 자연이 위에 있었다. 기묘한 소리, 마치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숨소리를 내며 둘은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미칠듯한 증오에 휩싸였다. 이럴 수는 없어! 그 둘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영원히 포개어진 채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꿈이 익숙하다. 나는 숨을 쉬었다. 사람이 쉬는 숨을 쉬었다. 흐흡, 하아, 흐흡, 하아. 심호흡했다. 영원을 호흡했다. 그제야 꿈은 일렁이고, 나는 손이며 발을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자마자 나는 둘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내 증오는 꽤 오랜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추동력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큼성큼 내딛던 내 발걸음은 갈수록 느려졌다. 그게 내 다리가 더뎌진건지, 아니면 숨이 모자랐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꿈이 제 특유의 변덕을 부려 나와 두 사람의 사이를 한껏 벌려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걸었다.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게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아니,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멀리서는 어떤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좀 웃겼다. 왜냐하면 다소 발랄한 그 노래의 제목은 <Love will tear us apart>였기 때문이다. 이미 갈라진 우리를 보는 난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시야가 그들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허락했을 때 나는 말을 잃었다. 요셉의 몸은 썩어 구더기가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더기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구더기는 내 새끼 손가락 두 마디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주름진 살과 그 밑의 가시 같은 다리를 꾸준히 놀리며 요셉의 그 마르고 길쭉한 사지를 뜯어먹고 있었다. 피부는 이미 변색되어 바닷빛에, 초록과 파랑이 한껏 뒤섞인 어떤 빛에 가까웠다. 그것은 전혀 생명의 징후가 아니었다. 아니, 피부랄 것이 이미 거의 남지 않았고 뼈와 살이 잿빛에 가까운 색으로 드러나있었다. 요셉의 왼쪽 손목 밑으로는 손이 없었고 오른쪽 무릎 아래로는 정강이와 발이 없었다. 눈알은 이미 다 썩고 파먹혀 없어졌고 높았던 콧대도 허물어진지 오래였다. 짐작은 했건만.

 나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연은 오르가즘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마침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때 나는 이 꿈이 악몽이고, 악몽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얼굴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절정에 달해 입을 조금 벌리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며 한껏 풀어진 동공은 강자연의 것이 아니라 이림의 것이었다. 아연실색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사지의 통제력을 잃었다. 마침내 그들이 환희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순간에 겨워 아무 것도 못하고 멈춰설 때까지, 그리고 그 순간을 넘어 갑자기 나를 돌아볼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연의 깊은 눈동자가, 요셉의 썩은 눈자위가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새하얀 면사 침대 시트에 땀이 흥건했다. 날은 컴컴했다. 저녁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을 잔 것이다. 나는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마시고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 앉았다. 그리고 뭔가를 하고 싶었다. 몸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뭘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마치 살면서 처음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문득 나는 배출의 욕구를 느꼈다. 자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쓰기에 대한 욕망이었다. 나는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 즉, 나와 내 주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해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림과 강자연과 장요셉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스무 장이 넘는 종이에 기술했다. 그래야만 어떤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내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떤 부분은 지리멸렬하게 늘어지고, 어떤 부분은 너무 묘사가 적고, 총체적으로 읽기 어려운 글이었다. 쓴 걸 다시 읽으니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작업은 해가 천장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대학생 때보다 못한, 레포트 비슷한 무언가를 갖게 된 나는 그 글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것이 중요한 보고서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주의깊게 읽었다. 그러고 나선 어떤 부분에는 밑줄을 긁고, 어떤 부분은 완전히 삭제하고, 어떤 부분은 문법을 교정하고 어떤 부분은 순서를 바꿨다. 다시 말하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이걸 끝낸 걸까? 이건 미완성의 글이 아닐까? 설령 완전한 한 편의 글이라고 한들 내가 이걸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쓴 글에 대해, 즉, 나 자신에 대해 대한 불확신으로 가득차버렸다. 그게 일반적인 경우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만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로 <Love will tear us apart>를 크게 틀고, 내가 쓴 글을 프린트한 뒤, 원본 파일을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그 글을 서랍의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버린 후, 밥을 먹고, 울었다. 망각은 편리하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가 너무 편리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요셉은 왜 죽었을까.


*


 요셉이가 죽었다. 다들 명복을 빌어주자. 오늘 발인에서 봐.


 내가 요셉의 부고를 들은 건 퇴근 시간이 삼십 분도 남지 않을 무렵이었다. 창우가 장례식장의 위치와 함께 간단한 추모의 메시지를 보낸 것을 뒤늦게 확인했을 때였다. 대학 시절 동아리 임원진들이었던 녀석들끼리 모여있는, 만든 지 몇 년은 된 낡은 단체 메신저방이었다. 소식이 전달된 것은 네 시 언저리였다. 나는 그때 회의중이었고 한창 회의록을 속기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을 복사해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다른 부차적인 회의에 또 참석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그 내용을 다시 요약하여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결정된 사안의 일부를 담당해 처리하고 있었다. 막내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퇴근이 다가와서야 연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친구가 죽었습니다. 그런 말로 둘러댄 나는 심지어 정시보다 십 분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은 홀가분하지 않았다. 그건 업무에서 비롯된 권태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권태라는 사사로운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컨테이너 선의 닻만큼 거대하고 무거운 중압이 시시각각으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오랜 친구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비교적 긴 대학시절 내내 나와 함께한 녀석이었다. 끝은 별로 좋지 않았고 그건 내 잘못이었지만 어쨌든 내 대학 생활을 요셉을 빼고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객관적인 시간만 놓고 따지면 전 연인인 자연만큼, 아니, 자연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래 지낸 녀석이었다. 요셉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여행 동아리의 회장직을 물려줄 녀석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요셉의 죽음은 팔이나 다리 한 쪽을 강하게 잡아 뜯긴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내겐 팔과 다리가 세 개 달려 있어 한 쪽이 뜯겨도 아프기만 할 뿐 일상 생활은 가능한 상황이었다…. 비유가 좀 이상하다. 내가 나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표현하려는 건 아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그저 신체의 일부만큼이나 일상적인, 아니, 일상적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일상이 그렇듯 이젠 지난 일이므로 일상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퇴근을 조금 일찍 해서 9호선을 비교적 한산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 지인이 죽었고, 막내인 주제에 회사에서 가장 먼저 퇴근했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장례식장엔 전 여자친구가 올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요셉과 중학교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과격하게 대했던 어떤 성향…,, 퀴어적 성향을 공유하는 사이였고 그런 이유로 나와 끝이 좋지 못했다. 한 가지, 먼저 짚지 않으면 안 될 점은,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악인이 아니라는 점을 무엇보다도 먼저 밝혀두고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다. 내 성격적 결함이 좋지 않은 우연의 연속과 맞닥뜨린 것을 근거로 내 됨됨이를 평가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시 말해, 우리의 헤어짐은 필연이었다.


 핑계를 대려던 건 아니었다. 핑계를 댈 마음은 그때도 지금도 전혀 없다. 그렇지만 핑계를 대려는 꼴이 되어버렸다. 부의금 오십 만원이 그 증거였다. 일, 이십 만원이라면 모를까 오십 만원을 부의금으로 내는 대학 친구는 드물다. 아니, 없다. 오십 만원은 벌이나 씀씀이에 관계 없이 메시지를 내포하는 액수이다. 그걸 알았을까, 요셉의 홀어머니가 나를 보는 눈치가 심상하지 않았다. 아들의 자살에 책임을 물으려는 원망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삶 동안 분가한 아들을 돌보아줄 수 있었던 그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에게 그녀는 무한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걸 억누른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단지 내 추측에 불과할 지라도, 나는 그 눈빛의 예리한 모서리에 몇 번이고 찔렸다. 분향을 하고, 절을 두 번 하고, 요셉의 어머님과 여동생에게 목례를 하는 삼 분 남짓한 시간에 나는 많이 다쳤다.

 동기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왔다. 아무래도 가까이 지내기도 했고, 잔업이나 야근을 하고 오는 녀석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요셉과 같이 대학 시절 동아리 임원진이었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모이면 우리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는 얘기란 불가해한 성질을 지닌, 말하자면, 괴담 같은 것이다. ‘어떻게’, ‘왜’, ‘누구랑’ 따위의 부사를 붙여가며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면 처음 듣기로는 암담하고 먹먹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 나중엔 그저 그런 평범한 에피소드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그래, 평범함이 핵심이었다. 누군가의 삼촌이 돌아가시고, 누군가의 부모님은 이혼하시고, 누군가는 결혼하고 벌써 애가 둘이라는 얘기를 나누며 그 처음 또는 중간 또는 끝에 요셉의 얘기를 꼭 덧붙이다보면 꼭 ‘우린 대체 언제 어른이 되어버린거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최소한 그 대화의 맥락에서 어른이란 곧 평범한 사람을 의미했다. 여러 의미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요셉은, 그래서, 우리에겐 영원히 대학생이고 천진한 초년생이었다. 우리는 요셉을 추억했다. 요셉을 추억할 때 우리는 그의 무수했던 남자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가 가십을 좋아하는 호모포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우리는 요셉을 동성애자로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고프고 항상 사랑을 하던 좋은 녀석으로서 기억하고, 추모했다. 요셉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에게 나면서부터 부여된, 타협할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이었고, 그 다름으로써 요셉은 오히려 모든 사람의 일부, 즉, 우리랑 다를 게 없는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다 함께 몰려다니며 술을 먹고, 엠티를 하고, 사랑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그 끝을 시덥잖은 농담으로 맺는 친구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친구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술기운에 북받혔는지 한 녀석이 눈물을 뚝, 뚝 흘리기 시작했다. 점차 모두가 울상이 되었다. 뒤늦게 도착해 상주에게 인사를 하고 막 자리에 착석한 창우는 술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나와 함께 녀석들을 대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좋은 녀석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장 반 년 전만 해도, 출장 중이라 참석하지 않았던 나를 빼고, 정기적으로 모여 술을 마시고 근황을 공유하던 사이였는데. 요셉은 그 직후로 누구와도 근황을 공유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든, 우리에게 비추어진 건 요셉의 그런 매정한 면모였고, 이제 그는 그것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생긴 것이었다. 그 사실이 되려 우리를 서럽게 했다. 죽음은 그토록 강했다. 죽음에는 괴물 같은 힘이 있었다.

 “먼저 갈게.”

 한참을 주차장에서 울고, 있는 담배 없는 담배를 긁어모아, 담배를 끊은 놈과 피우지 않는 놈들까지 연초를 뻑뻑 피우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또 보자, 얼른.”

 “왜 가?” 창우가 물었다. “계속 있어야지. 요셉이네 어머니랑 동생이랑 얘기도 나누고.”

 “자연이가 들어가는 걸 봤어.”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왔어? 언제?”

 “우리끼리 질질 짜는 동안. 슬쩍 보더니 건물 안으로 그냥 들어가더라.”

 “어어…, 그래도 왔으니 인사 한 번은 하고 가.”

 나는 됐다고 했다. 거짓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자연이 거기 있었어도 같은 말을 했을 터였다. 전 연인과 마주치는 건 몇 년이 지나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내게 정말 인사라도 한 번 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진즉 눈물을 닦고 먼저 그녀에게 달려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정말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은 실이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몇은,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에도, 설킨 채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린 그걸 다 자르지도 못했다. 어려서 그랬을 것이다. 나약해서 그랬을 것이다. 또 겁에 질려서 그랬을 것이다.

 창우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면 짐을 챙겨 가져다줄 테니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들어간 녀석들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그러면서 상념에 잠겼다. 검고 진득한 상념에 발목을 붙잡혔다. 암울하고 그윽한, 악취가 풍기는 예감이 무거운 가슴의 가장 밑바닥서부터 기어올라왔다. 요셉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아니, 죄책감이었다. 요셉의 죽음에 내 책임이 얼마만큼 있을까를 궁금해하는 호기심, 이기적인 계산 감각이었다. 아주 빠르게, 요셉의 자살에 내가 눈에 띌 만큼 큰 지분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뇌를 지배했다. 그걸 어떤 종류의 죄책이라 말해야 할까, 무엇에 대한 죄책이라 말해야 할까. 어쩌면 어렸을 때 다닌 여름 성경학교에서 배운 원죄라는 것에 좀 더 어울릴 만한 감각이었다. 밑도 끝도 없었다.

 딴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이대로 상념이 내 목을 옥죄게 두면 공황이라도 올 것만 같았다. 하여 나는 자연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자연을 상상하면 눈 앞에 그 모습이 선연했다.


 “요새도 안 끊었어?” 자연이 말했다.

 “못 끊은 거야.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답했다. 어색해서 말이 길게 나오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창우 오빠가 얘기해주던데. 나 보기 싫어서 밖에서 담배나 뻑뻑 피운다고.”

 “웃기네.” 쓴웃음이 나왔다. “나, 네가 여기 온 줄 정말 몰랐거든.”

 “뭔 소리야?”

 “여기 있기 싫어서 네 핑계 대고 그냥 나와있던 거야. 네가 여기 왔는지는 몰랐고 그냥 둘러댄 거였어. 너가 식장에 있어서 껄끄러우니 그냥 밖에 있겠다, 하고.”

 “쓰레기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특유의 예쁜 눈웃음이 정겨웠다. 그리고 그게 정겹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여전하다. 나도 한 대만.”

 내가 건넨 담배를 받은 자연은 불도 빌렸다. 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녀가 흡입하는 연기의 양이 나로 하여금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를 가늠케 했다. 자연은 요셉과 중학교때부터 친구였으니까. 말로는 부족할 만큼 요셉과 깊은 관계였으니까.

 “요셉이 편으로 가끔 네 소식을 들었어.” 잠깐의 정적이 있은 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듣고 안심했어.”

 “왜?”

 “왜라니?”

 “내가 잘 지내는지, 못 지내는지를 오빠가 왜 신경썼는데?” 그녀의 어조가 날카로웠다.

 “못 지내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그래? 난 오빠가 못 지내기를 바랐는데.”

 “네가 바란 대로 비참하게는 못 살아서 미안하다야.” 나라고 그런 반응에 우물쭈물할 위인도 아니었다. 내가 맞받아치자 자연은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있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이나 깊이 어색했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은게 요셉이 아니라 나였다면 자연은 기뻐했을까? 내 장례식에도 자연은 찾아와줬을까?

 우리는 내가 스물 여섯, 자연이 스물 둘일 때 만나 내가 스물 여덟, 그녀가 스물 넷일 때 헤어졌다. 연차로 이 년, 기간으로는 일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이었다. 우리가 사귄 기간 만큼이나 우리의 관계 역시 애매했다. 우리 사랑의 형태를 무엇이라 표현해야할지 사귀는 내도록은 물론 헤어지고 난 이후로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 부드럽다든가, 거칠다든가, 차갑다든가, 뜨겁다든가 하는 형용사를 다른 커플들에게 즐겨 붙이고는 했다. 정작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었는데도. 심지어 우리는 그 사실을, 우리의 사랑에 아무런 속성이 없음을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가 혼란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나는 양비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그 잘못과 책임의 소지에 있어서만큼은 양비론을 즐겨 사용한다. 어쩌면 내가 그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직장에서와 달리, 우유부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달리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자연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좋아했고, 자연은 내가 보수적이고 해이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좋아했는데.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갉아먹을 거라는 걸 알기에 우린 너무 어렸다. 이십 대는 그런 때니까. 뭔가를 안다고 생각해도 실은 전혀 모르고, 세상을 가진 것처럼 굴어도 실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나이니까. 최소한 사랑에 한해서는. 그러나 작금의 화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옛날부터 그랬네, 넌.”

 “뭘?”

 “‘안’과 ‘못’을 구분 못하는 거.”

 “구분 ‘안’하는 거였어요, 이 양반아. 오빠는 담배를 안 끊는 게 맞아. 골초라서.”

 “야, 강자연, 시비 걸 거면 왜 보러 나온거야?”

 “보고 싶어서.” 자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런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안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답이 내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기 때문이다. 헤어진 전 연인의 ‘보고싶었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의 힘 따위를 나는 믿지 않았다. 다시는 믿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줄곧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이젠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장례식장에 가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의 목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밥과 국은 물론 술과 다과, 음료수까지 내어주는 이유가 뭘까? 뭐 좋은 일이라고 잔칫상을 벌여가며 조문객들을 대접하는 걸까? 그날 요셉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추측한 바로는, 아마도, 장례식을 계기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속에 담아놓았던 정담을 오랫동안 풀기 위해 상을 차리는 게 이유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맞다면, 기왕지사 잘 살기 위한 방책이 장례식장에서의 식사였다.

 작고 영세한 장례식장이라 그런지, 식사 공간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손님들이 많았다. 그 자리엔 요셉 말고도 다양한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환으로 죽은 손님들인 듯,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걸 가만 들어보니 가장 단명한 사람이 일흔 아홉이었고, 가장 장수한 사람이 아흔 셋이었다. 즉, 79, 82, 83, 93. 그리고 그 사이로 26. 숫자가 너무 달랐다. 그리고 그 숫자들의 차이만큼 손님들의 분위기도 달랐다. 요셉의 조문객들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통하다 못해 처절했다. 삶이 그들에게 상처를 냈다. 그들의 상처는, 나이에 과분하게, 깊다 못해 넓었다.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나는 그 간극이 싫었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앉았다.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다른 녀석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요셉의 조문객들이 앉은 반대쪽에 앉았다. 육개장과 술과 나물 반찬이 대접되었다. 나는 속이 머슥거렸고 기분이 좋지 않아 다 식은 고사리만 깨작거렸다. 반면 자연은 육개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홀로 술을 홀짝이며 그녀가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장면을 감상했다. 생명력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너 굶었어?”

 “다이어트 중이야.”

 “안 되는 걸 자꾸 하려고 하네, 옛날부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안 하는 거야, 안 되는 게 아니라. 구분 똑바로 해.” 자연은 짜증을 냈다. 그러나 이윽고 의기소침해져 말했다. “스트레스성 폭식이야.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생명력은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류하는 것이었다.

 “너는 소식 언제 들었어?”

 “오늘 아침에. 영주한테 들었어. 요셉이 동생. 이제 수능도 친다는데, 불쌍도 하지. 오빠는?”

 “나는 창우한테.”

 “신기해. 난 오빠가 안 오려는 줄 알았어.”

 “왜?”

 “요셉이를 싫어했으니까.”

 “요셉이를 싫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닌 척 하려고 하지 마. 까먹은 거야, 아니면 아닌 척 하는 거야? 나는 창우 오빠나 다른 애들이 아니야. 오빠는 항상 요셉이를 싫어했어. 맨날 나랑 붙어다녔으니까. 오빠 다음으로 많이.”

 나는 발끈해서 반박했다. “아무리 내가 바빴어도 그렇지, 남자 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랑 맨날 어울려 다니는 여자에게라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분명히 밝히는데, 난 요셉이를 싫어한 게 아니었어. 너랑 비교할 순 없겠지만 요셉이는 나한테도 소중한 친구고, 후배였어.”

 “그러면 오빠는 둘 다 싫어했던 거야.” 자연은 체념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좋아하는 척 했지만 실은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내쳤을 리가 없어. 나도, 요셉도.”

 “그렇지 않아.”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쳤다니.”

 “그렇지 않다고? 그럼 엠티에서 있었던 일은 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일, 오빠랑 헤어지고 다른 애들한테 들었어. 난 당연히 요셉이가 스스로 얘기해서 사람들이 알게 된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친구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정말 궁금한데?”

 왜 그랬을까? 요셉이 동아리에 들어오고 회장인 나와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날, 요셉은 내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있죠, 형, 나 남자 좋아해요. 동아리방에 단 둘이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키보드로 레포트를 쓰던 손이 우뚝, 하고 멈췄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감각이 선연하다. 그때의 난 당혹감을 넘어서 경악하기까지 했다. 누군가, 아마도 어떤 미국 소설가였을텐데, 말했듯 그 나이대의 남자들은 게이의 존재 자체를 종종 망각한다. 아닌 경우에조차도 상상의 동물처럼 게이를 생각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말을 왜 하는 거야?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여행 동아리고,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제가 여기서 계속 활동해도 될까요?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요셉과 마주쳤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요셉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다급한 요구의 손길이었다.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물론이지. 나는 말했다. 여기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마음이 공정한 마음이었을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고마워요, 형. 형에겐 항상 믿음이 갔어요. 요셉은 말했다. 나는 그저 동정했던 걸까.

 문제는 그 뒤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쯤에 엠티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신입 부원이었던 요셉과 자연을 포함해 스무 명 정도가 함께 한, 나름 규모있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즐거웠다. 펜션에서 우리는 젊음이 허락하는 한 술을 마시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장기 자랑을 하고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그러다 체력이 하향 곡선을 그리면 한, 두 명씩 나가떨어지고 어떤 녀석들은 당돌하게도 밖에서 단 둘이 손을 잡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남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런 것들을 안줏거리삼아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취기에 부원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누굴 좋아하네, 누가 누구랑 썸이 있네, 누가 누구한테 관심이 있네. 자연 화제는 밖에 산책을 나간 녀석들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요셉이랑 자연이도 자주 붙어다니던데. 야, 자주 정도가 아니야. 항상 붙어다녀, 항상. 부럽다, 자연이 이쁘잖아. 그런 종류의 얘기가 나왔다. 그리고 취기에 나는 요셉이가 게이이므로 그럴 일은 없다는 말을 했다.

 “맹세컨대, 그건 실수였어.”

 방금 그 말이 사실일까? 방금 그 말이 진심일까? ‘실수로’ 요셉의 정체성을 드러냈을까? ‘실수로’ 요셉의 정체를 드러낸 걸까? 실수라면, 나는 용서 받을 수 있는 걸까? 실수라는 것이 너그러운 개념이라면, 그게 어떤 의미에서든, 내 행동이 실수였다는 말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다. 요셉이 게이라는 말을 했다는 걸, 그리고 그 말을 수습한답시고 다들 모른척 해달라고 했다는 걸 실수라고 잘 포장할 수 있다. 그리고 엠티를 다녀온 한 달 후 요셉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 다들 몰랐던 척 지지의 손길을 내밀었던 걸 실수를 잘 무마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몇 년 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실증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수란게 과연 너그러울까? 내가 그렇다고 해서 내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걸까?

 “그러시겠지.”

 “정말이야.”

 “요셉이는 죽는 그 날까지도 몰랐어. 만약 ‘실수’였다면, 오빠가 그걸 ‘실수’라고 정말 생각했다면 왜 요셉이한테는 말을 꺼내지조차 않았던 걸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싫어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이 말을 하는 나 스스로도 내 말에 신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말을 해야만 했다. 그건 사실이었고, 실은, 사실에 기반한 자기 변호였다. “사실이 아니야….” 

 많은 얘기를 했다. 자연은, 말투에서 느껴지는 증오 비슷한 무언가와는 달리, 또는, 무언가에도 불구하고 나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마음의 정체를 알고 싶어 대화를 이어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자연이라고 아닌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자연도 나름대로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테니. 말하자면 그건 해명의 장이었다. 두 사람이 겨우 앉을 크기의, 위생 비닐이 깔린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잔에는 서로가 지금껏 숨겨뒀던 무언가가 오고 갔다.

 다음은 그 얘기들 중 일부이다.

 “유서에 나에 대한 내용이 있었어? 나 때문이다, 뭐 그런 내용이 아니더라도.”

 “몰라.” 자연은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정말이야.”

 “네게도 보여주시지 않았구나.” 나는 자연이 요셉의 가장 오래된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십 년도 넘게 사귄 친구가 모른다면, 아마 유가족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거라 짐작했다. 나는 짐짓 실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자연의 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구더기가 종이를 갉아먹어서 아무도 읽을 수가 없어.”

 신물이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여섯 달. 나는 여섯 달이라는 간격을 떠올렸다. 그룹 메신저에서 요셉은 여섯 달 동안 연락을 받지 ‘않’은 게 아니었다. 받지 ‘못’한 것이었다. 여섯 달 동안 그의 시체에서 구더기가 번성한 것이었다. 나는 널브러진 요셉의 몸이 썩고 문드러져 그 위로 구더기떼가 뒤덮인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상했다.

 “아무도 요셉이 왜 죽었는지 몰라.”


 나와 자연은 술잔을 부딪혔다. 그건 분명 장례식에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했다. 우리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이후로 만난 적이 없던 우리는 우리 안에서만큼은 그때의 우리로 남아있었다. 물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잔은 유달리 세게 부딪혔다. 자연은 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러고도 연거푸 다섯 잔을 내리 마셨다. 나도 그녀와 속도를 맞추어주었다. 하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아까부터 정체 모를, 썩은 무언가가 위장에서 구린내를 내 온몸에 퍼뜨리는 기분이었다. 기분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네 시였다.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뜸해졌다. 이제는 퇴근을 하고 늦게라도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자연의 전화가 울렸다. 세, 네 번 진동하고서야 자연은 자신이 휴대전화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듯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짧았다.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길어야 사십 초 남짓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보였다. 소꿉친구의 장례식장이니 이미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띌 정도로 그녀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누구인걸까? 이 시간에.

 “누군데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여자친구.”

 “얼마나 됐는데?”

 “일 년 조금.”

 너는 누구와도 일 년 만에 질려버리는구나, 라는 말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은건지, 자연은 피식 웃으며 내 잔에 술을 채웠다.

 “알아, 나도. 참 끈덕지지가 못하지.”

 “싸웠어?”

 “조금. 아니, 심하게. 아니, 아마도 헤어질거야.”

 저런, 어쩌다가? 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참았다. 자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았다. 차오르던 눈물은 이윽고 흘러넘쳤다. 태평양을 막던 제방이 터지듯 눈물이 샘에서 폭발했다. 아무래도 상주들에게 들릴 것 같아 예의가 아닌 듯하여 나는 그녀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자연은 두 발로 디디고 설 힘도 없는 듯 내 품에 기대어 울었다. 서러운 울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우는 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녀를 안아주었다.

 듣는 사람조차 서러워지는 울음. 얼핏 들으면 웃길 정도로 처절한 울음. 요셉도 저렇게 운 적이 있다.

 학교 후문의 배다리집이라는 허름한 술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엠티 이후로 나는 요셉에게 밥과 술을 자주 사주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재고의 여지가 많지만 어쨌든 요셉이라는 녀석이 마음에 들었고, 차기 회장으로 걸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를 잘 챙겨주고 싶었다. 그 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점, 동아리, 진로, 취업, 연애, 결혼, 종교, 정치. 그러니까, 술에 취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셈이었다. 나는 우리가 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요셉아, 너는 학교나 동아리에 좋아하는 사람 있냐? 그런데 내가 연애의 화두를 꺼냈을 때 요셉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짝사랑 하냐? 아니면 안 좋은 일 있었어? 나는 웃음기 있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요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이미 요셉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었다. 녀석은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뭔가 보수적인 데가 있었다. 사랑이라는 화두에서 꽉 막힌 무언가를 느꼈다. 형은 내 마음이 어떤지 몰라요. 그렇게 말하고 녀석은 울었다. 술집 한가운데에서, 건물이 무너져라 울었다. 황급히 나는 술값을 계산하고, 녀석을 챙겨 밖으로 나왔었다. 그 날의 소동은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토를 하다 기절한 녀석을 내가 자취방까지 데려다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이번엔 그런 일은 없었다. 한껏 울던 자연은 꽤 오랫동안 내 품에 기대고서야 기운을 추스르고 손등으로 그친 눈물을 닦았다. 나는 문득 두 사람의 모습이 퍽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요셉도 이런 식으로 운 적이 있었어.”

 나는 자연에게 내 넥타이를 손수건 대용으로 건네며 말했다.

 “배다리집에서. 걔는 누가 죽어서 운 건 아니었지만, 짝사랑이 잘 안 돼서 엄청 슬퍼하더라고.  그래, 너희 둘, 우는 것도 엄청 닮았어. 역시 십년지기라서 그런가봐.”

 “그게 언제였는데?”

 그녀는 넥타이로 코까지 야무지게 풀면서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약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아까와 달리 그녀의 말투가 유해졌기 때문에 공손히 물음에 대답했다.

 “넥타이는 빨아서 돌려줄게.”

 “그래.”

 “해야 할 말이 있어. 아까 말했지.”

 조금은 급작스러운 서두였다. 나는 그 말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강하게 이끌렸다.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힘 있고 강렬한 갈구를 느꼈다. 우연에 가까운 욕구였다. 다만 어디까지나 우연에 ‘가까운’ 욕구였다.

 나는 자연을 보았다. 자연의 얼굴을 보았다. 옛날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눈에 비친, 그녀의 눈이 보는 나는 옛날과 같은 얼굴일까? 어떤 마음이 움직였다. 다시, 어떤 마음이 멈췄다. 달리 말하면 그리움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는 내가 실은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음을, 동시에, 내가 그녀와 결코 다시는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볼 때 나는 그녀만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셉. 요셉의 존재가 그녀에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줄곧 그녀가 요셉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 이유였다. 내겐 그녀만이 드리워져있는데, 그녀에겐 나뿐만이 아니라 요셉이 드리워져있었다. 이제 요셉이 세상에 없는 지금에조차, 아니, 지금에 이르러서 더 강하게 그녀로부터 그의 낌새가 느껴졌다. 그건 내 사랑의, 나라는 사람의 한계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보았다. 옛날만큼이나 검고 깊은 눈동자였다. 맑고 예뻤다. 그리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예감이 들어서였다. 강한 예감이었다. 그리고 직감이었다. 자연 같은 강한 여자조차 말하지 못한 얘기라면 나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상이었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퍼뜩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민했다. 고뇌했다. 조금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분명 그랬다. 그리고 나는 이윽고 손을 뻗었다.

 “듣고 싶지 않아. 지금은.”

 “왜?”

 “나는, 아마 지금껏 날 봐온 너라면 알겠지만, 어떤 것에는 서투른 것 같아.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투른 것 같아.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의 나 자신에게조차 서투른 것 같아. 그래서 준비가 필요해. 대비가 필요하고.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 단지 그 뿐이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약해. 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비열해. 요셉에게 내가 한 일, 아까 말한 그건,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실수’ 따위가 아닌가봐. 비열한 나약함이지. 그래서 요셉에 대한 얘기는 오늘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들을 수 없어.”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긍정의 의미였다. ‘실수’ 만큼이나 너그러운 말이었다.

 “내 나약함을 이해해줄래? 준비가 되면 네 얘기를 들을게. 내가 들으러 갈게.”

 야트막하게 동이 트는 시간이었다. 주변히 우물쭈물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녀는 나를 떠나갔다. 요셉처럼. 나는 두려워졌다. 느꺼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


 나는 내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허나 돌이켜보니 그건 기만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망각이 두렵기 때문이다. 잊는 것이 두렵고, 잊혀지는 것이 두렵기 떄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요셉과 자연에 대한 얘기이다. 그들이 꿈에서 내게 뭐라고 했는지 떠오른 것이다.

 세 음절의 말이었다.


날 봐줘.


*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나서였다. 여름은 관음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아로새겨진 멍자국은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체결되지 않았다. 나는 상처받은 채였다. 그런데 내가 왜 상처를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유를 짐작하라하면 간단히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일까? 내가 상처를 준 사람의 죽음으로 내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설명일까? 내가 울린 사람으로 인해 내가 울어야 한다는 것이 과연 역학적으로 옳은 명제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 억울한 처사가 현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울었다.

 이삿짐을 나르고, 관리비 잔금을 정산할 겸 우체통을 뒤졌다. 평소엔 어플리케이션으로 모든 일을 다 처리했기 때문에 우체통을 들추거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어본 우체통 안엔 먼지가 낀 많은 고지서들이 있었다. 휴대전화요금, 보험료, 세금, 관리비 따위의 것들. 나는 어쩌면, 매체가 떠들어대는 사랑과 증오 따위가 아니라, 바로 저런 것들이 진짜로 삶을 굴러가게 하는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건조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는 엽서가 한 장 끼어있었다. 엽서의 앞면으로는 좌측 상단에 淸水寺라고 쓴 것과 내일의 날짜 외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념품점에서 산 것을 그대로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한자를 검색한 다음에야 그것이 한국식으로는 ‘청수사’라고, 일본식으로는 ‘기요미즈데라’라고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밑으로 GO, JAPAN!이 볼드체로 써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엽서를 뒤집어보면 아마도 기요미즈데라의 전경을 찍은 사진이었다. 우거진 숲 위로 언덕 같은 지형에 수직과 수평으로 기워낸 나무기둥이 사찰과 난간을 떠받치면 그 위로는 거대한 기와지붕, 그 사이로는 한껏 들떴으며 동시에 약간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산중턱에 위치한 사찰로부터 내다보이는 도시 경관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찰의 어떤 건물들은 오래되어 바랜 나무의 색을 띠고 있었고 다른 어떤 건물들은 주단빛으로 벌겋게 칠해 나 여기있소 하고 자기 주장을 한껏 뽐내는, 일견 사찰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족히 수백 년은 되어보였다.

 나는 심지어 약간 겁에 질렸다. 요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셉의 원령이 내게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나의 졸업을 기념하여 자연이 나와 요셉과 셋이서 일본 여행을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사실 나를 제외하고, 는 아주 재미있는 여행을 기대하며 계획을 신나게 짰다. 기요미즈데라는 여행 코스 중 하나였다. 그곳에 아주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자연이 역설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에 가기를 기대했다. 독감에 걸려 막판에 나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기는 했지만. 요셉이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형, 교토에 가면 할 말이 있어요.

 그런데 요셉과 자연은 여행을 갔었다. 나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고, 그걸 계기로 그냥 헤어지기로 결심했었다. 요셉이 여행을 다녀오며 내게 건낸 엽서를 나는 북북 찢어버렸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형이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요셉은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더라. 퍼뜩 떠오르는 건 ‘꺼져’인데, 내가 제발 그러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마지막이 그런 식이었다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다. 한참이 지나고 나는 그 일을 후회하며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은 마지막으로 마지막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끝이 나로 하여금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격동하는 마음을 평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억누른 나는 잔금을 정리하고, 새로 이사한 집에 짐을 풀자마자 나는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향했다. 거기서 나는 교토로 향하는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예매했고, 밥도 먹지 않은 채 커피 한 잔으로 밤을 새운 뒤 곧장 비행기를 탔다. 기내에선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세웠던 여행 계획을 떠올렸다. 간사이 국제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곧바로 라피트를 타고, 난바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미도스지 선을 타고, 기요미즈고조 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타고 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열두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확신도 갖지 않은 채, 그저 미약한 믿음만으로 나는 이국으로 향했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알지 않는다. 믿음은 믿음인 채로 가치있기에.

 언덕길을 십여 분쯤 올라 기요미즈데라에 도착한 나는 입장권을 받아 절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거기 있는지 알지 못했다. 거기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어디에 있을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걸었다. 걷고, 걷고, 걸었다. 우마도메를, 니오몬을, 삼층탑을 배회했다. 관음당과 수구당을 샅샅이 뒤졌다. 회랑과 본당과 부타이를 이 잡듯 수색했다. 그 외에도 이름조차 모르는 수십에 달하는 기요미즈데라의 건물들을 돌아다녔다. 다시, 나는 계속 걸었다.

 내가 그 누구도 찾지 못하고 수구당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약간의 탈수 증세를 겪었다. 커피 한 잔을 제외하면 지난 수십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몇 시간은 광증에 가까운 마음으로 미친 듯이 걷기만 해서 지병인 이명이 도졌다. 나는 고요한 곳에 갈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그런 곳이 있는지 번역 어플을 이용해 겨우겨우 물었고 나는 ‘태내’로 들어갔다. 태내는 수구당의 지하에 위치한 일종의 체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백 엔 씩을 내고 태내로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가림막을 젖히고 내려간 계단부터 칠흑에 가까운 어둠이 나를 뇌까리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듯 내려간 나는 계단의 마지막 즈음에서 넘어졌다. 바깥에서 ‘다이죠부데스까(괜찮으십니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려 ‘하이, 하이(네, 네).’ 하고 답했다. 그러자 ‘테무리오 오츠카마리 쿠다사이(벽면의 손잡이를 이용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돌아왔다. ‘다이죠부데스까’도 겨우 알아들은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엉거주춤, 벽면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손잡이 비슷한 무언가를 잡고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내는 아주 고요했다.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고요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공포에 질렸다. 사람이 아무런 빛도 소리도 주어지지 않고 오직 돋은 소름의 감각과 심장의 박동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을 때 얼마만큼의 공포가 주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벽을 더듬거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본다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CCTV로 그 모습을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무서웠다. 손잡이를 잡고 코너를 돌았다. 그러나 코너를 돌았다는 감각 자체가 없었다. 나는 걸어갔다. 오 미터를 걸었다. 그랬더니 오른편으로 어떤 빛줄기가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얗고 순결한 빛을 본 적이 없었다. 빛은 천장에 뚫린 아주 작은 구멍을 통해 스며들어오는 자연광, 태양광이었다. 광선은 아주 올곧게 사방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 서서 그 광경을 감상했다. 일종의 황홀경이었다. 나는 ‘황홀하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 황홀한 빛은 어떤 조각상을 비추고 있었다. 돌부처였다. 우스운 얼굴이었다.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양각에,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양각에 내리꽂히는 빛이 우스운 웃음마저 소박하고 장엄한 경건함으로 탈피시켰다. 나는 또다시 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걸 바라만 보았다. 체감으로 오 분은 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상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합장했다. 엉뚱하게도 나는, 몇 달이 지난 그 시점에, 요셉의 명복을 빌었다. 다시 어두운 태내 복도를 따라 걷고, 코너를 돌아,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면 밝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달라보였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달라보였다. 아름다움이라는 한 겹의 필터를 세상이 내 동공에 씌운 모양이었다. 무언가가 벅차올랐다. 슬픔과 기쁨과 환희와 절망이 겹겹이 쌓인 멜랑콜리였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무엇도 이전과 같은 것이 없는 것 같아 멍하니 선 채로 세상을 구경했다. 그 모양새가 저를 구해줄 사람을 찾기를 기다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날 구해줘. 나는 외쳤다.


 “요셉이는 오빠를 좋아했어.”

 우리는 부타이의 낡은 목재 난간에 서 교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라든가 ‘와줘서 고마워’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본론으로 곧장 넘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런 무례한 화법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에게 설명할 것이 많았다.

 “주차장에서 오빠가 그랬지. 요셉이한테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고. 배다리집에서. 그때 요셉이가 사랑하고 있던 건 오빠였어. 왠진 묻지 말아줘. 나도 물어보지 않았거든. 다만 추측할 수 있는 건 처음에 오빠가 선뜻 요셉을 동아리에 받아준 것 때문에 좋아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해. 물론 그게 요셉이의 실수였는지 아닌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구입한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나와 오빠가 사귀기 전부터 요셉이는 내게 오빠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많이 했었어. 오늘은 림이 형이 무슨 옷을 입었네, 어제는 림이 형이 밥을 사줬네, 내일은 림이 형이랑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석촌 호수를 가네….”

 요셉과 그런 것들을 했던 것이 기억에 떠올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가 마침내 오빠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내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나는 이미 오빠와 사귀기 시작하고 난 뒤였어. 그때까지 우린 우리의 사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얼떨결에 요셉이에게 우리 관계를 고백했었어.”

 “그랬구나.”

 “응. 미안해.”

 “그런 답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우리는 시덥잖다는 듯 웃었다.

 “요셉이는 충격을 받았었어. 물론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애초에 잘잘못이랄 걸 따질 사안이 아니었지만 난 요셉이에게 미안하다고 했어. 요셉은 그로부터 며칠, 아니 몇 주 동안 나와는 얘기를 나누지 않았어. 그치만 난 상관 없었어. 심지어 난 그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왜냐하면 오빠가 내가 요셉이랑 같이 어울려 다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내가 양성애자니까. 정확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오빠가 말했었지만, 어쨌든 나한텐 그게 그거였었고. 하지만 몇 주 뒤에 우린 그냥 화해했어. 다만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었지.”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고?” 나는 되물었다. “그 말의 뜻이 뭐야?”

 “요셉이 만나는 남자친구가 너무 빨리 바뀌기 시작했어. 물론 그전에도 요셉이 연애를 하는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고 서로의 일상에 대해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 난 이상함을 느꼈어. 거의 일주일, 빠르면 다 엿새 간격으로 애인이 바뀐거야. 나는 그런 생활이 요셉을 더 불안정하게 할 거라고, 무분별한 사랑은 너를 갈가리 찢어놓을 거라고 말했어.  나는 요셉이를 열심히 설득하고 타일렀지만 요셉은 단호했어. 자신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그래서 우린 예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없었어. ‘감정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방식을 바꾸’랬어. 기억나? <Love will tear us apart>, 조이 디비전.”

 왜 요한은 조이 디비전을 떠올린 걸까. 왜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노래를, 자연과의 시시한 이별에 인용한 그 노래를 요셉이 그 시점에서 재인용한 걸까. 어떤 사고의 흐름이 산사태처럼 나를 덮쳐버리고 말았다. 감각이 마비되고 숨이 격해졌다. 지금이라도 뭔가를 게워내지 않으면 속에서 유독한 물질이 내 장기들을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이 이상해졌다. 열기가 올랐다. 한껏 찌푸린 얼굴의 여기저기서 태평양 같은 물이 침수되었다. 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억수같은 슬픔이 도래했다. 자연은 내게 품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게 대체 다 뭘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걸까?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걸까? 억울한 심정으로 나는 자문했다. 삶을 향한 억울함이었다.

 “왜?” 그러다 겨우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자연에게 물었다.

 “씨발, 사랑하니까! 사랑 없이 무엇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없게 되었을 때, 난 느꼈어. 우리는 더 이상 중학교 때의 아이들이 아니구나, 라고. 처음 만났을 때 알고 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니게 되었구나, 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절박해졌어. 왜냐하면 그게 두려웠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게. 그즈음의 난 우울했고, 마침 오빠랑 사소한 것들 때문에 종종 싸우기도 했었어. 난 많은 게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를 받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뒤바뀌고, 허물어지고, 마침내 붕괴되는구나, 라고 생각했어. 지금 돌이켜보면 어이 없는 생각이지만. 그래서 난 무언가를 해야만 했어.”

 “그게 뭔데?”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오빠와 만나기 전의 나로, 요셉과 친했던 나로, 어른이 되기 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난 오빠와 헤어졌어. 우습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하지만 난 어렸고, 많이 어리석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사과를 받아달라는 말 조차 하지 않을게.”

 그 말을 듣던 나는 약간 화가 났다. 그건 내 생각이 맞았기 때문도, 차마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가능성이 진실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셉을 내 친구로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셉의 삶을 걱정해주는 동지가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리고 요셉과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기회를 박탈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그러고 화를 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화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실은, 화가 나지 않았다. 분노는 사실에 기반한 것이고, 사실이란 결국 내가 요셉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었으니까. 요셉에 대한 나의 기억은 결국 토막에 불과한, 짤막한 장면 몇 개로 편집되어있으니까. 이제 와서 울고불고 발광을 해도 손 쓸 도리가 없으니까. 그건 자초한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수사를 이제 와서 붙여본들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은 엇고,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 다 깨진 독에 물 붓기밖에 되지 않았다. 내 억하심정이 향해야 할 곳은 요셉도, 자연도 아니었다.

 삶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 화는, 결국, 나를 향한 것이었다.

 “요셉이 자살한 데에 내가 기여한 부분도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말했다.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자연이 말했다.

 “넌 왜 그러는데?”

 “오빠 먼저.”

 “내 잘못이 있으니까.”

 “간단하네.”

 “넌?”

 “오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뭐, 그런 거.”

 “설득력이 부족해.”

 요셉은 어떤 이유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건 벌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한폭탄 같은 벌 말이다. 우리는 요셉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대가로 요셉은 우리 자신의 안에 있던 스스로를, 스스로의 목소리를 가져가벼렸다. 나는 요셉이 보고 싶었다. 녀석의 쾌활한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장례식이 끝난 후부터야 든 생각이었다. 요셉은 장례로써 모든 것을 끝냈다. 모든 것 중에는 우리도 있었다.

 어둑해졌다. 우리는 말 없이 교토를 내려다보았다. 교토는 넓고, 복잡했다. 그리고 명랑한 불빛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앞은 하얗고 뒷꽁무니는 시뻘건 특이한 물고기처럼 도로를 헤엄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로 난 인도를 저벅저벅 걷고들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만큼 깊은 회한에 젖어본 적이 없으리라 확신했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나만큼 괴로운 고민을 하고 있기를 바랐다. 내려가자. 내려가서 우리 짧았던 대화의 매듭을 짓자. 그러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 나는 자연에게 말했다. 자연은 동의했다. 우리는 부타이를 떠나, 기요미즈데라를 떠나 산길을 내려갔다. 느린 걸음이었다. 그래서 삼, 사십 분은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이 좋아요. 언젠가 요셉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요셉의 말을 비열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요셉도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웃으며 무마했었다. 그 기억이 왜 그 시점에 나야만 했을까.


 우리는 술집에 들어갔다. 맥주를 마시고, 값싼 사케를 마시고, 야끼토리와 오뎅을 먹었다.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방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영업이 끝나는 시간까지 끝나지도 않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얘기했다. 그러다가 불량해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편의점으로 몰려들어갔고 우리는 겁을 먹었다. 다른 술집에 들어가기엔 우리는 돈이 없었다. 최소한 나는 환전을 충분히 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자연의 숙소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섹스를 했다. 옛 기억을 더듬어 서로를 탐닉했다. 그러나 다 끝나고서야 옛 기억을 더듬는 것 만큼 멍청한 짓이 없듯, 우리의 섹스 역시 멍청한 짓이었다. 우리는 두 번 섹스를 했다. 처음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두 번째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무언가란, 이제 우리는 전과는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있기에.

 이제 뭘 하지. 나는 자연에게 물었다. 살아가야지. 자연이 내게 답했다. 어떻게? 나는 자연에게 물었다. 돈을 벌고, 섹스를 하고, 보험료를 내다가 죽어야지. 자연이 내게 답했다.

 “뭐야, 방금은 살아가라며?”

 “시시하긴. 살아가는 건 죽어가는 거야.”

 그 시시한 말엔 놀랍게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 울림으로부터 어떤 욕구를 느꼈다. 그건 비밀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 고백하고자 하는 욕구였다.

 “있지. 우리 셋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어.”

 “어째서?”

 “시간이 남아 돌아서.”

 “농담하지 마.”

 “농담이 아냐. 그게 내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이야.”

 “그렇다면 오빠는 요셉이를 충분히 보내지 못한 거야.”

 “맞아. 근데 그게 될까, ‘충분히’ 보내기.”

 곰곰이 생각하던 자연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는 알몸으로 서로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요셉이를 생각하며 하던 게 있어. 그러다 자연이 내게 말했다. 뭔데? 내가 물었다. 자연은 담배를 문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향을 피우는 것 같았다. 나는 웃었다. 미쳤어, 넌. 자연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그러게, 난 언제부터 미쳤을까? 옛날부터. 나는 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부터. 이림과 강자연은 이림과 이자연처럼, 또는, 강림과 강자연처럼 웃었다. 형제자매처럼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꼬나문 고개를 위로 들었다. 연기가 위로 홀연히 피어오르면 그 연기가 요셉이 있는 곳까지 가닿기를 바랐다. 여기 말고 그곳에도 우리가 있기를 바랐다. 우리로서 하나였던 우리가.

 문득 다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글도, 태워, 연기를 피우곤, 없애버리겠노라고. 그리고 내 죄의 모든 흔적, 또는, 요셉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추억들을 모두 없애버리겠노라고. 그것이 곧 이제껏 함부로 모든 걸 잊고 산 이림의 고백이고, 사죄였다.


*

  너무 오래된 것은 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잊은 것은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복수를 위해 칼날을 갈아 돌아온다. 벼려진 분수령의 칼날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서야 우리는 망각을 멜랑콜리로 갈무리한다. 그러나 그건 충분하지 않다. 그래. 분명,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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