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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Oct 04. 2021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 인간실격 - 중간 리뷰 1

인간실격 1-10부를 보고 나서 하는 이런저런 생각

1.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는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 아주 얇게 한 겹 한 겹 인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드러낸다. 이 방식은 시청자에게 인내심을, 배우들에게는 아주 섬세한 연기를 요구한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를 읽고 인물들의 관계도를 보며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을 갖고 화면을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인물의 말과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 방식이 쉽거나 친절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마치 현실에서 타인을 알게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만큼 다층적인 맥락의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취향과 가치관과 성격과 습관을 가진 아주 입체적인 존재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은 매 순간의 단편적인 말과 행동일 뿐이다. 그러한 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상대를 알아가게 되고, 상대에 대한 감정의 온도는 형성되고 변화하며, 나의 복잡한 맥락이 때로는 상대의 맥락과 연결이 되며 새로운 맥락을 만들게 된다. 인간실격을 10부까지 보면서 인물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 이러한 방식 때문일 것이다.


2. 동시에 인간실격은 ‘드라마’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에, 카메라의 렌즈가 향하는 곳에 나의 시선이 닿게 되고 감독이 의도한 만큼 나의 시선은 거기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실격만의 방식은 아니지만, 인물이나 인물이 존재하는 세계의 설정값이 다른 드라마보다 모호한 방식으로 느리게 전달되는 만큼 시선이 닿는 사물이나 풍경은 일종의 ‘상징’으로써 중요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신발 - 특히 구두 - 이 그렇다. 카메라는 현관에 벗어둔 신발이나 혹은 그 신발을 인물이 어떻게 다루는지를 자주 비춘다. 신발은 우리가 밖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마주하는 고단함의 흔적이기도 하고, 그 고단함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이기도 하며, 혹은 어딘가 더 좋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지도 모를 희망이기도 하다. 벗어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주는 마음이나 새 신발을 사주는 마음은 모두 상대에 대한 아주 조용하고 보드라운 배려다. 그런 의미에서 정수가 부정의 신발을 살 것처럼 계속 사이즈를 가늠하다 결국 사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다. 정수는 부정에 대해 늘 그렇다. 그것이 처음부터 그랬는지, 혹은 어느 순간부터 그랬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부정에 대한 배려와 관심과 애정이 있음에도 그 마음은 언제나 부정에게 가닿지 못한다. 마음의 크기 때문인지 혹은 방향 때문인지도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3. 인간실격은 어떤 커다란 사건이 계속 발생하며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으로 서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아주 일상적인 배경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난다. 사실 커다란 사건들은 이미 드라마의 시작 전에 모두 일어났으며, 드라마는 그 이후의 이야기다. 정우의 자살은 드라마가 시작하는 순간이다. 부정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 - 순탄치 않았던 커리어의 어떤 기간과 퇴사, 유산, 남편의 외도도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 사실 드라마가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최소한 일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강재의 아버지가 자살한 것은 그보다도 한참 전의 일이다. 우남이 순규와 같이 살기 시작한 것과 이혼한 것 역시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난 일이다. 민정 역시 아이돌 지망생으로서 소속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던 순간이 있었으며, 아란 역시 캐나다에 있는 숨겨둔 아이의 출산, 쇼윈도 부부로 지내는 남편과의 결혼과 이후 가정폭력, 그리고 부정과 함께 출판한 책과 그 이후 부정과의 갈등이라는 큰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부정과 강재는, 마치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PTSD를 경험하고 있지만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며 낯선 일상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4. 인간(人間)이라는 것은 한자로 뜯어본다면,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와 거리를 내포한다.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더 주목하게 되는데, 9부의 제목인 ‘세 사람’과 8부의 제목인 ‘다윗과 밧셰바’는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라마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를 살펴보게 한다. 성서에서 다윗은 밧셰바와 관계를 만들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밧셰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야와의 관계를 버린다. 사실 다윗과 우리야의 관계, 우리야와 밧셰바의 관계가 있었던 만큼 이 관계가 가장 유사하게 적용되는 경우는 순규-우남-우남의 전처 또는 딱이-민정-강재 정도가 되겠지만,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수많은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다. 세 사람이 모두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 첫 번째 사람과 세 번째 사람의 관계에 타격이 있어야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아갈 수 있는, 혹은 첫 번째 사람과 두 번째 사람의 관계로 인해 세 번째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거나 불리해지거나 화가 날 수 있는 관계는 인간실격에 여러 층위로 존재한다.


 - 부정, 강재, 정수

 - 정수, 경은, 부정

 - 경은, 정수, 경은의 남편

 - 순규, 우남, 우남의 전처 (어쩌면 과거에는 우남의 전처, 우남, 순규?)

 - 딱이, 민정, 강재

 - 서 선생, 젊은 여배우, 아란

 - 강재의 엄마, 같이 사는 형, 강재의 돌아가신 아버지


여기에서 조금 애매한 것은 종훈-아란-서 선생의 관계, 그리고 정우-정우와 함께 자살한 아이 엄마-(아이의 친아빠)의 관계다. 종훈과 아란의 관계는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관계가 서 선생에게 타격이나 위협이나 불쾌감이 될 수 있을까? 한편 정우와 함께 자살한 여자는 남편이 이미 죽고 없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명확하지는 않으며 어쨌든 정우와의 관계는 주위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에 드라마를 보면 조금 더 생각이 떠오를까?


5.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역시 관계 때문이다. 말장난 같지만, 관계가 없다면 그냥 人이다. 드라마는 1부부터 ‘인간의 자격’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3부에서 ‘투명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누군가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부정과 강재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4부의 제목은 ‘사람 친구’와 6부의 제목인 ‘아는 여자’는 어쩌면 그 관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방향의 문제가 있을 뿐 하나의 선이기에 얽힐 수가 없지만, 세 사람 이상이 되는 순간 얽히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얽힌 관계의 끈을 놓아 버리거나 끊어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강재가 부정과의 관계를 끊어낸 10부의 제목은 ‘제자리’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강재와 부정이 다시 만나는 11부의 제목이 기대가 된다.


6. 거의 드라마의 주제곡처럼 반복해서 나오는 제프 버클리의 할렐루야, 그리고 다윗과 밧셰바 이야기를 되새겨 보면 죄, 죄책감, 회개와 용서와 구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상처,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누군가에게 잘못하게 되는 것…  때로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 즉, 누군가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죄를 짓기도 한다.


밧셰바 신드롬은 성공한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몰락하는 것을 뜻한다. 다윗은 밧셰바와 결국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죽는다. 다윗은 단식하며 신께 용서와 구원을 빌었지만 아이를 살릴 수는 없었다. 다만 다윗과 밧셰바는 결국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훗날 솔로몬 왕이 되는 아이를 얻는데, 이는 진실된 회개와 오랫동안의 고통 이후의 일이다.


7.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인간실격은 또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자, 개별적인 고통의 이야기이고,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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