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꼰 연재 4화
화천현장귀농학교의 농사팀장이 된 남편을 따라 화천에 온 후, 시골 생활에 적응하랴 농사지으랴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고추 따기 싫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날도 여러 번. 사실 무엇이든지 잘 하고 싶은 서울 깍쟁이로 살아온 터라, 살림도 농사도 제 마음에 들게 못하니 속상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하늘이 파랗고 쨍한 날에는 놀아야 한다.”며 산과 강으로 데리고 다녀준 남편 덕분에 슬픈 마음을 금세 잊어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학교에 딸린 작은 관사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가끔씩 변변치 않은 신혼살림에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과 학교 운동장을 우리의 마당으로 삼아 뛰어 놀 때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들었다.
농사 외에는 아무 신경도 쓸 수 없는 바쁜 신혼을 보내는 와중에 운동장은 어느새 푸르러져 있었다. 결혼식 날짜는 받았고, 시간은 흐르는데 정해진 것이 없었다. 정한 것 이라면 ‘우리만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할 것’ 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일을 마치고 저녁노을이 드는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올리고 싶은 결혼식을 조금씩 구상해 나갔다. 우선 자연을 배경 삼아 운동장을 활용하기로 했다. 운동장 구석에 버려진 축구골대를 무대로 쓰고 학교 식당에 있는 상과 의자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위해 텃밭 모퉁이에 키워둔 쪽으로 무대에 쓸 실크를 염색했다.
아무리 작은 결혼식이라지만 이것저것 해야 될 목록들을 적어보니 도저히 남편과 둘이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 수고를 알아주신 시댁 부모님께서 결혼식 전 명절에 화천으로 와주셨다. 3박 4일을 함께 준비했던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평생 효도해도 모자랄 일이다. 시어머니께서는 마스터 가드너로 숲 해설 일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취향과 뜻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천연염색은 물론 테이블 구성까지 함께 만들어갔다. 막상 시골에서 구하려고 해도 없는 여러 가지 소품들을 집에 가지고 계신 덕에 솔방울, 잣방울, 마카다미아 열매, 나무 받침대 등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모두 갖고 계시는 천연소품 만물상 역할을 해주신 것이다.
시아버지께서는 교회에서 촛대와 꽃바구니, 부케, 코사지를 지원해주셨다. 친정 이모께서는 천에다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갖고 계셔서 축구골대에 걸어 놓을 작품을 울산에서부터 공수해와 주셨다. 얇은 천을 덧대어 우아함을 더하고 전구를 달아 빛을 냈다. 나의 친구들은 전날부터 와서 물심양면 결혼식을 도와주었다. 학교 창고에 있는 농기구들과 벽돌, 여러 소품을 이용해 입구를 꾸미고 미리 소독해 둔 소주병에 들꽃을 꺾어 꽃병을 꾸몄다. 재주가 많은 귀농학교 사람들은 각자 결혼식 연주, 축하주, 음향, 설치, 주차 등에 봉사해 주니 든든하고 감사했다.
마침내 결혼식 당일, 운동장을 가득 메운 연주 소리와 화사함이 결혼식을 실감나게 했다. 하나 둘 도착하는 자동차와 자리에 앉은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전 날 밤까지도 빠진 부분은 없나 확인하느라 초주검이 된 우리의 얼굴을 보고 차마 웃지 못했던 어른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신랑 신부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멀리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힘으로 했다고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우리만의 힘으로 한 것이 없었다. 식이 시작되자마자 걷힌 먹구름과 곳곳마다 닿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 역사하신 하느님의 보우하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식 시작 10분 전부터 창고에 숨어 있었다. 기진맥진이 되어 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지만 두 손을 꼭 잡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신랑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목소리를 듣고 트렉터의 시동을 켰다. 사람들의 환호! 두 손을 흔들며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부가 됨을 서약했다.
분명 트렉터에서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건만 단상에 서서 부모님 얼굴을 뵈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 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특히 친정아버지께서 벌게진 얼굴로 눈물을 참아가며 시를 읽어주실 때에는 그 순간이 내 삶에 영원한 부분으로 남을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식의 끝에서 친구들의 축복 속에 사진을 찍을 때는 폭죽이나 종이 꽃가루를 대신해 박주가리를 불었다. 후후 불어 멀리 떠나는 박주가리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우리의 긴 여행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박주가리의 꽃말과 아버지께서 읽어주신 시가 맞닿은 결혼식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게 긴 여행의 시간을 주셔서. 그리고 그 길에 혼자두지 않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