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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Oct 16. 2024

영화 전,란과 조선이라는 나라

조금은 위험한 각색에 관해

  지난 11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보았다. 잘 만든 사극이었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관여했다고 했던가. 역사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인물의 서사를 쌓아 올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최고는 검술 액션과 이를 표현한 미장센이었다. 사지 절단 묘사는 지나쳤지만 검으로 하는 액션을 이토록 정교하게 잘 짜 놓은 사극을 근래에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다만 몇 가지 설정이 불편했다. 극 진행과 영화의 메시지 전달을 위해 부득 필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묘사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관한 큰 오해를 줄 여지가 있었다. 국뽕도 문제지만 자학은 더 큰 문제다. 전 세계에 제공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 아닌가. 식민사관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 몇 가지 딴지를 좀 걸어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묘사한 조선은 무분별한 수탈을 일삼는 지배층과 고통받다 못해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인 백성들로 구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타락한 국가는 마른 장작 같다. 전란으로 촉발된 불똥이 옮겨 붙는 순간 분노의 불길은 나라 전체를 사르고 잿더미만 남긴다. 계급 갈등을 소재로 삼았기에 영화는 임진왜란을 다루나 일본군과의 싸움은 별다른 관심의 대상에 두지 않는다. 제 권력이 우선인 사악한 왕,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 아래에서 억압받는 민초. 극단적인 이분법이다. 실제로도 그러했을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외세의 침략이 아니었더라도 자체적인 모순으로 인해 망할 수밖에 없는, 망하는 것이 마땅한 그런 봉건성으로만 가득한 왕조였을까?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장면 하나

피난길, 가마가 뒤집히며 진창에 중전이 얼굴을 박는다. 아내의 안위를 걱정하기는커녕 진작 말을 탔어야 했다며 핀잔을 주는 선조 임금. 힘겹게 고개를 든 중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꽂힌다.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중전의 모습에 왕도 그 방향을 바라보는데, 불타는 수도 한양과 궁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왜군은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조선의 백성과 노비가 불을 질렀다는 보고를 받은 선조는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장면은 바로 경복궁과 광화문에 불을 지르는 백성들에게로 이어진다.


  경복궁에 누가 불을 질렀는가. 기록은 말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선조가 피난한 1592년 4월 30일의 기사다. "도성의 궁성에 불이 났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정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중략) 유도 대장이 몇 사람을 참하여 군중을 경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로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보면 영화의 묘사는 실제 역사 기록을 기반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특이한 점은 40년가량 먼저 쓴 <선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같은 4월 30일 자의 기사를 보면 '온종일 비가 쏟아졌고' '왕과 세자는 말을 타고 중전은 교자를 탄' 상태로 새벽에 서울을 떠났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비와 웅덩이와 말과 가마를 통해 영화는 이 기록까지 놓치지 않고 묘사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더 읽어 보자. 1592년 5월 3일 기사에서 피난 중인 선조 일행은 경성 함락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적이 한강을 헤엄처 건너는 시늉만 하였는데 장수들은 도망가고 병사들은 붕괴하여 경성이 텅 비게 되었다는 내용, 활짝 열린 성문으로 적이 무혈입성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다(時, 宮闕盡爲焚燒)"는 보고이다. <선조실록>의 기록은 적의 한양 입성과 궁궐의 방화를 연결 지어 이야기한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자 했던 성난 백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 정권이 만들어낸 두 개의 실록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기록은 또 다른 기록으로 보완할 수 있다. 일본군의 선봉으로 가장 먼저 한양에 들어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 오오제키가 쓴 <조선정벌기>가 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5월 3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어 있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나라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그는 진시황의 아방궁을 떠올릴 만큼 조선 궁궐의 위용에 크게 감탄한 것으로 보인다. 더 늦게 서울에 들어선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종군 승려 제타쿠의 <조선일기>를 보면 5월 4일까지도 궁궐은 그대로였다. 다른 승려 텐케이의 <서정일기>에는 삼일 뒤인 5월 7일에서야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해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침입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한양에 입성할 때만큼은 궁궐이 그대로였던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궁궐이 불탄 시점이 이와 같다면, 침략자들의 말발굽 아래 놓인 조선 백성이 먼저 나서서 궁궐에 불을 지르는 것이 가능했을까? 백성들이 자신의 도성에 불을 질렀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조선의 무능을 강조하고 온갖 이유를 다 끌어들여가며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주장을 펼쳤던 일제였다. 논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역사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성난 백성에 의해 불타는 궁궐을 화려한 영상미로 담아낸 영화는 카타르시스를 줄법도 하지만 어딘지 모를 찜찜함을 준다. 자국의 백성조차 외면한 나라임을 강조하며 이득을 얻었던 자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학살, 조선시대의 일인가?


장면 둘

  나루터에서 선조는 부실한 수라상을 받아 든다. 보잘것없는 식사에 왕이 반찬 투정을 부리려는 찰나 어디선가 날아온 돌덩이가 날아와 밥상을 덮친다. 벼룩의 간을 내먹는 왕실의 행태에 분노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국왕에게 달려들자, 호위군은 칼을 빼들고 다가오는 자국 백성들을 무참히 베어내기 시작한다.

  선조는 어렵사리 나룻배에 오르고, 배를 향해 몰드는 백성들도 무참히 베임을 당한다. 배에 매달린 자들을 떨어트리기 위한 칼질에 손목과 손가락이 잘려나가며 배 안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적이 이용할 수도 있다는 염려에 선조는 자신이 강을 건너고 나면 나루터뿐만 아니라 주변 민가까지 모두 불태워 없애라는 지시를 내린다.


  7년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인조 4년(1626년) 영의정 이원익이 왕에게 "난을 치른 이후 백성의 수가 평시의 6분의 1이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할 지경이었다. 뒤이은 병자호란까지 양난을 전부 생각한다면 어림잡아도 전체 인구의 70%가 전란으로 사망한 셈이라는 계산도 있다. 양난을 기점으로 조선이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한 피해였다.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것이었다. 상상조차 버거운 귀무덤이나 코무덤이 버젓한 역사의 한 페이지라는 점은 참 끔찍하다. 영화는 이마저도 비틀어 수많은 조선인의 코를 일본군이 아니라 임금 앞에 던져놓는다.


  오묘한 지점이다. 영화는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그다지 성실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러닝타임 동안 더 충격적으로, 더 오랜 시간 비추는 모습은 조선의 군인에게 살육당하는 백성의 모습이다. 나룻배에 오른 선조의 행태는 물론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조실록>은 임진강을 건넌 임금이 적병이 뗏목을 만들어 따라 건널 것을 염려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고 적고 있다. 이 명령은 임금을 따라 피난길에 오른 신하들이 지치고 굶주려 잠든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하의 절반 이상이 왕을 따라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의 임진강 도강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정자에 쌓인 나무를 불태우게 되는데, 그 이유가 적병의 추격보다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던 어둠을 걷어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장면의 모티프가 된 수라상 이야기도 나온다. 강을 건너 동파역에 도착하였을 때,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왕의 수라상을 준비하였으나 호위하던 하인들이 난입하여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임금이 굶게 되자 문책이 두려워진 장단 부사는 도망했다. 굴욕으로 점철된 피난길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제사상에 오를 음식을 빼앗은 임금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백성이나 임금의 나룻배에 매달린 백성의 손을 끊어내는 장면은 역사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적 상상력으로 치부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피난길의 왕이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고 분노하여 국왕을 습격하는 백성이니. 그들이 가진 투쟁력과 혁명 정신은 가히 마르크스가 울고 갈 급이다. 배를 붙든 손목을 잘라내는 것은 삼국지의 일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권신 동탁의 피살 이후 이각과 곽사의 손아귀에서 한 헌제를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신하 동승이 뱃전에 매달려 함께 떠나는 관리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창으로 손가락을 찍어버렸던 이야기 말이다.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왕의 비겁성을 강조하며 백성을 짐승만도 못하게 보고 있음을 부각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4.3 항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조선시대 버전을 생각한 것 같은데, 사실 이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희한한 나라다. 임진전쟁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덮쳤으면, 오랑캐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린 왕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서 신하들이 제가 먼저 배에 먼저 탑승하겠다며 왕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면 망해도 백 번은 망해야 정상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그 이후로도 족히 200년을 더 갔다. 이상한 일이다.

  조선의 흥망성쇠가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최악의 결말로 끝나게 되면서, '조선은 왜 망했는가'가 우리의 유일한 질문이었다. 근대화에 성공한 이웃나라와 달리 조선이 뒤쳐지고 밀려나고 지배당하게 된 이유를 조선의 전근대성에서 찾는데 혈안이 되어왔었다. 산업화에 성공한 지구 반대편의 나라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땅따먹기에 나선 시대에, 우리 이웃국가가 작은 유럽을 자처하며 침략의 야욕을 불태울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뒤쳐졌다.(정체성론) 이게 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이율배반적으로 공맹을 외우던 지배층의 무능과 탐욕 탓이다. 상복 입는 시기 가지고 논쟁할 만큼 한가했던 그들이 당파싸움에 몰두하며 사치와 향락, 권력놀이를 일삼은 탓이다.(당파성론) 반성이 깊다 못해 자기 비하로까지 이어졌다. 조심해야 한다. 이게 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다.


  조선은 500년이 넘도록 왕조를 지켰다. 흔치 않은 장수 왕국이다. 왕이 피난을 가고, 왕이 항복하는 굴욕을 맛보고도 왕조가 끊어지지 않았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버텼는가?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보수적이고 경직되었으며 질서유지에 특화된 그 성리학 말이다. 임금을 포함한 조선의 지배층은 정치가이기 전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철인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그 철학은 위정자에게 끊임없이 백성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을 주문하는 학문이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수립한 민주국가는 결코 아니었지만 정치하는 이들에게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라는 책임을 강하게 주문했다. 국왕은 백성의 고통에 동참할 줄 알았다. 국왕이 그러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도록 철학자들로 구성된 신하 집단이 끊임없이 국왕을 견제하고 괴롭히고 공부시켰다. 국가의 존재 이유, 그걸 '민본'이라 불렀다. 자연재해 등으로 기근이 들어 백성이 굶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임금은 이를 제 탓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왕을 대리하여 백성을 관장하는 지방관은 가뭄을 제 탓이라 여기고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국왕은 눈물지으며 왕위를 내려놓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백성이 굶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들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임금이 스스로 자신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백성들이 잡초 제거로 어려움을 겪을 것을 국왕이 먼저 걱정하기도 했다. 백성을 굶기는 수령은 가차 없이 처벌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것이 조선 모든 임금이 알고 있었던 임금의 모범이요, 임금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소양이었다.


  급박하게 피난길에 오른 선조 임금에게 잠든 신하들을 깨워 모두 데리고 갈 만큼의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질렀는지, 적병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불을 질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200년간 평화를 지켜온 나라는 큰 전쟁을 마주하여 모든 것이 대단히 서툴렀다. 그러나 그것이 자국의 백성의 손을 끊고 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조선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관의 수탈에 고통받다 못해 결국 들고일어나는 순간에도 절대 나랏님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탐관오리를 쫓아내고 관아를 털어 그가 착복한 재물을 나누고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의 본분을 다하며 나랏님의 처분을 기다렸다. 자비로운 임금이 우리의 억울한 처지를 알고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농민봉기가 대개 그러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꼭 임진왜란이어야 했을까? 꼭 실제 역사 상황과 실존인물의 외피를 씌워야만 했을까? 그것이 널리 알려질 경우의 역사의 오해에 관한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할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씁쓸했다.


  


참고자료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https://ch.yes24.com/Article/View/13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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