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에서 미케네로
신화의 역사
유럽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옳을까.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Europa)는 그 이름부터 매우 적합한 존재다. 그녀의 모습에 반한 제우스는 난봉꾼답게 하얗고 잘 생긴 황소로 변신하여 그녀를 납치한다. 그녀의 이름은 곧 대륙의 이름이 되었다. 황소가 그녀를 태우고 다닌 모든 곳이 바로 유럽이라는 것이다. 유럽사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제우스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은 에우로페는 후에 크레타의 왕비가 되었다. 크레타의 왕위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 미노스(Minos)로 이어졌다. 크레타는 일대의 강국이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미노스 왕도 바람기 넘치는 난봉꾼이었다. 자신의 위세를 믿고 신들에게도 함부로 했다. 한 번은 포세이돈에게 바치기로 약속한 하얀 소를 빼돌리다가 발각되었다. 아름다운 소를 보고 욕심이 난 까닭이었다. 심지어 포세이돈에게 바치기로 약속하고 바다의 신에게서 받은 소였다. 욕심의 대가는 저주로 이어졌다. 미노스 왕의 부인 파시파에(Pasiphae)가 그 소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정말로 소에게서 연정을 느꼈는지, 소와 통정하여 신의 아이를 낳은 시어머니의 사례를 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기대와 다르게 미노스의 부인은 소와의 사이에서 괴물을 낳았다. 소머리에 인간 모습을 한 반인반수에게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노스의 소라는 뜻이었다.
특이하게도 미노스는 식인의 습성이 있는 이 괴물을 기르기로 결정했다. 크놋소스 궁전의 지하에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을 만들고는 괴물을 여기서 키웠다. 괴물의 먹이는 속국 아테네에서 조달했다. 아테네의 소년, 소녀 일곱이 매년 조공물이 되어 괴물의 먹이로 바쳐졌다. 섬나라 크레타는 해상강국이었고, 육지의 아테네는 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불공정한 거래에 분노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공물단에 자원했다. 크레타에서 만난 미노스의 장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해 아버지와 조국을 저버리고 미노타우르스 제거 작전에 동참하기로 했다.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처럼, 조국을 배신한 열렬한 사랑이야기가 갖는 보편성이 있다. 조국을 등진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연인의 변심으로 배신자는 또 다른 배신의 피해자가 된다.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미궁의 설계자 다이달로스에게 안내했고, 설계자의 지혜를 빌려 미궁의 길을 되짚을 수 있는 긴 실타래를 연인에게 주었다. 그녀의 헌신 덕에 테세우스는 무사히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살해하고 조국을 구한 것은 당연했다.
아들 테세우스를 적국에 보낸 부왕(父王) 아이게우스(Aegeus)는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테세우스의 여정을 반대하였으나 마침내는 자식의 뜻을 꺾지 못한 흔한 아버지였다. 테세우스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고자 말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오면 흰 돛을, 그렇지 않다면 검을 돛을 달겠노라고. 아테네 왕은 매일같이 높은 절벽 위에 올라 멀리 아들의 생환을 확인하곤 했다. 테세우스가 타고 간 배가 수평선 너머 나타난 것은 많은 날이 지난 뒤였다. 반가움도 잠시, 돛의 색이 거무죽죽한 것을 확인한 아버지는 낙담하여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가 몸을 던진 바다는 에게 해(Aegean Sea)라 이름 붙었다. 아이게우스의 바다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미노타우로스의 죽음과 미궁의 실패로 크레타 왕은 크게 분노했다. 설계자의 도움 없이는 결코 탈출할 수 없는 미궁임을 잘 알았기에, 왕은 다이달로스에게 책임을 물었다. 빠져나올 수 없도록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을 미궁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천재 발명가는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밀랍을 녹여 새의 깃털을 이어 붙인 날개를 만들고는 탈출을 기도했다. 너무 높거나 너무 낮게 날지 않을 것을 아들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기쁨에 심취한 아들은 아버지의 조언을 잊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뜨거운 태양에 밀랍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결국 아들은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으니, 그 유명한 이카로스(Icarus)의 이야기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늘 잊곤 한다. 테세우스도 이카로스도 그랬다.
신화의 이야기는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된다. 에우로페에서 테세우스로, 다시 이카로스로. 신비함의 장막을 조금 걷어내고 보면, 그 안에는 실제 역사의 조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다. 이집트가 뒤를 이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문화도 문명도 마찬가지다. 선진 문명은 공간의 제약을 따라 주변으로 번져간다. 오리엔트에서 이룩한 문명은 크레타섬을 거쳐 그리스 본토로 옮겨갔다. 중국의 선진 문명은 한반도를 통해 보다 멀리 있는 섬에까지 전해졌다. 선진 문명에 접근성이 높았던 미노스의 섬나라가 먼저 그리스를 지배한 강국이 된 것 역시 상식적이다. 신화는 크레타의 중심추가 미케네로, 그리스 본토로 옮겨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역사적 영웅이었고, 헤라클레스는 스파르타 왕가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그들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했다.
미케네 문명
또 다른 신화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진 황금 사과 한 알에서 출발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겪은 억하심정 그 자체였지만 경쟁심 있는 다른 여신들을 자극하기에 더없이 좋은 문구였다. 황금 사과 쟁탈전의 심판을 맡은 것은 아름다운 목동 파리스였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보상을 택하고 미의 여신에게 사과를 넘겼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제안에 응한 것이다.
신은 무언가를 쉽게 주는 존재가 아니다. 아프로디테의 절세미녀는 유부녀였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친형이자 미케네의 왕중왕인 아가멤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내를 빼앗긴 것은 분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가 있었다. 미케네의 왕자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헬레네가 스파르타 왕녀이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없으면 왕의 정통성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헬레네와의 혼인은 쉽지 않았다. 미녀와 권력을 다 차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메넬라오스에게는 경쟁자가 많았다.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의 영웅들은 서로 연대할 수 있었다. 혼인의 결과에 승복하는 대가로 이 결혼에 문제가 생길 경우 힘을 합쳐 싸우도록 맹세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그리스 영웅 연합이 만들어졌다. 목동 파리스는 소아시아의 도시국가 트로이의 왕자였다.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대규모 원정이 펼쳐졌다. 신들마저 함께 뒤엉켜 싸우게 되는,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서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등 영웅들의 활약에도 승부가 나지 않던 전쟁을 끝낸 것은 또다시 오디세우스의 지략이었다. 철옹성의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었던 그리스 군은 거대한 목마를 두고 철수를 결정했다. 외적을 물리친 트로이가 목마를 전리품으로 챙기게 되면서, 그리스 군은 그토록 애를 써도 넘지 못했던 트로이의 성벽을 손쉽게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위대한 시인 호메로스는 이 전설을 노래하여 불세출의 작품 <일리아스>를 남겼다.
19세기, 호머의 서사시에 매료된 독일인 부자가 있었다. 신화의 내용을 철저한 역사적 사실로 믿은 그는 실체를 입증하고자 자기 인생을 모두 바쳤다. 사업도 접고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트로이 도시 유적 발굴에 나선 것이다. 반대하는 아내와는 이혼했다.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의 이야기다.
아마추어 고고학자의 발굴 근거는 오로지 <일리아스>의 문장이었다. 그는 이 서사시가 실제 역사에 기반한 것이라는 강한 믿음 아래 움직였다. 호머는 트로이 주변을 흐르는 두 강에 관해 하나는 김이 서려 올라오고 다른 하나는 얼음처럼 물이 차갑다고 썼다. 슐리만은 트로이 유적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강물에 신발을 벗고 직접 발을 담가 확인해 보기도 했다. 트로이가 목마 작전으로 불타버린 도시라는 점을 착안해 '노랗고 불그스레하거나 까만 나무재들이 완전히 불탄 벽돌 파편과 돌조각으로 섞여 2~3미터 두께로 쌓여 있는 거리'를 발견하자 트로이 프리아모스 궁으로 가는 왕도라고 믿었다. 열정이 앞섰던 아마추어의 발굴 작업은 놀랍게도 히살리크 언덕의 트로이 유적 발견으로 이어졌다. 1876년에는 미케네의 고분 발굴을 통해 크레타에서 미케네로 이어지는 에게 문명의 계통을 밝혀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개인사조차 신화적이었다. 슐리만은 발굴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30세 연하의 그리스 여인을 만나 재혼하였다. 그리고 이 '자신만의 헬레네'에게 발굴한 금제 장신구를 씌워 주기도 했다. 명백한 문화재 훼손 행위이자 그의 비전문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지만 그의 업적만큼은 명확했다. 신화의 역사성을 입증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 또한 신화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