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놓였을 때
<오이디푸스 왕>, 티케와 그노메의 대립
역병이 퍼진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재앙의 원인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전염병의 원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서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병균이나 바이러스도, 징벌이나 저주도 모두 육안으로는 보이지는 않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역병을 멈추는 방법을 찾고자 오이디푸스는 처남 크레온을 델포이로 보낸다. 처남은 전염병이 전왕(前王) 라이오스 살해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살인범을 찾아 벌하라는 신탁을 받아 온다. 신탁 앞에 오이디푸스는 자문한다. "대체 어떤 사람에게 닥쳤던 우연한 일(Τύχη, 티케)을 그분께서는 이렇게 드러내시려는 것인가?"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탐정소설처럼 전개된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가 역병을 계기로 과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구조다. 다만 여느 추리물처럼 범인 찾기가 주가 되지 않는데, 비극을 관람하는 그리스인 관객들이 살인범의 정체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소포클레스가 극화한 오이디푸스 신화는 당대 그리스인들이 결코 모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앞서 오이디푸스가 말한 티케(tyche)란 우연(chance)과 행운(fortune)의 두 가지 뜻을 다 갖는 개념으로, 테베의 왕은 이 우연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왕궁으로 불러오도록 한다. 그리고 그에게 살인범이 누구인지를 캐묻는다.
예언자는 이미 왕궁에 오기 전 점을 친 결과 범인이 오이디푸스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왕이 인정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답변을 회피한다. 장님과의 스무고개에 부아가 치민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 수수께끼로 말하면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예언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들도 신의 계시도 그대를 돕지 않았다. 그때 내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 무식한 오이디푸스가. 그리하여 새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지혜(γνῶμαι, 그노메)로 그녀(스핑크스)를 침묵시켰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테베의 왕으로 만든 최대 업적,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한 지혜를 강조하며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실패를 비꼰다. 답을 추궁하는 왕에게 예언자도 지지 않고 응수한다.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왕께서 가장 능한 사람이 아니시던가요?"
"나의 위대함의 근원인 바로 그 일을 갖고 나를 조롱하는구나!"
"하지만 바로 그 행운(tyche)이 그대를 파멸케 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를 물리친 사건이 위대함의 근원이며 자기 지혜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언자는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티케, 즉 행운이자 우연일 뿐이라 말한다. 왕은 태어난 지 3일 만에 두 발목에 구멍이 뚫려 가죽으로 묶여 버려진 까닭에 오이디푸스(Οἰδίπους)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오이디-푸스(Oedi-pous), pous는 발이라는 뜻이며 oedi는 분사로서 동사 oideo(οἰδέω, 부풀다)에서 파생된 표현이니, 버려진 갓난아이가 발견될 당시의 '부은 발'에서 유래한 이름인 것이다. 그러나 oedi를 동사 oida(οἶδα, 알다)와 연관 지으면 '발을 안 자', 곧 '발에 관한 수수께끼를 푼 자'라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오이디푸스의 최대 업적이기도 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의 정답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여러 장치를 통해 오이디푸스를 인간의 지혜(그노메), 신과 상관없는 소피스트적인 지혜를 상징하는 존재로 설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티케가 본래 제우스, 아폴론과 같은 강력한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던 사건을 말하는 것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우연이나 행운의 의미로 격하되어 쓰이게 됨을 생각하면 티케와 그노메의 개념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오이디푸스 왕> 비극의 구조는 이렇게 완성된다. 온전한 신의 섭리와 근시안적인 인간 지혜의 대립, 이와 같은 갈등 구조에서 실패가 확정된 인간의 비장함이 곧 비극이 된다. 티케는 오이디푸스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이며,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모든 것이 티케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알도록 하는 우연의 연속으로도 작용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여 티케를 피하고자 처절하게 노력하였으나 그 끝은 파멸로 귀결된다.
완전한 파국이다. 진상을 알게 된 왕비,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이오카스테는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좌절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뽑아 실명한 후, 뽑은 눈을 수염에 매달고 맨발로 방랑하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티케의 의미를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 이것만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결코 병이나 다른 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죽음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테니까."
오이디푸스의 도전적인 대사에서 '병'은 모든 일의 원인이 된 테베의 전염병을 말한다. 병 따위가 자신을 파멸시킬 수 없다는 외침으로 해석한다면 오이디푸스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순간에도 티케에 저항하기로 선택한 주체적인 인간상을 대표하는 존재가 된다. 왕비의 자살도, 스스로 두 눈을 뽑는 끔찍한 행위도 신에 대한 처절한 반항이다. 델포이의 태양신 아폴론 신전의 신탁에 맞서, 두 눈을 뽑는 행위를 통해 '다시는 빛을 보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당시 비극 공연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1년에 한 번 있는 축일에 전 시민을 모아놓고 상연하는 종교적인 의식이었다. 국가 종교의 핵심 행사로 신들을 위한 잔치 자리인 셈이다. 신을 기쁘게 하는 자리에서 신에게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주인공의 독백은 부자연스럽다. 취지와 지나치게 동떨어진다. '기구한 운명', 즉 티케가 오이디푸스를 죽음에서 구원했다는 말은, 신들의 티케 덕택에 그노메가 최상의 지혜인 양 살았던 오이디푸스가 비로소 과오(=죽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반성이자 깨달음으로 보아야 희곡의 의도에 일치하게 된다.
고통과 절망의 해답을 찾아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그노메 대 티케의 문제에 부딪힌 인간 주인공의 슬픈 결말을 다룬 비극이다. 신의 뜻이 승리하고 인간의 뜻은 꺾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공통적인 주제다. 미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준 파리스의 선택은 어리석은 것인가?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약속한 헤라나 위대한 지혜와 모든 경쟁의 승리를 약속한 아테나를 선택했다면 그는 조국 트로이를 파멸로 이끄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모든 신화의 주제,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이다. 누구도 신들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근거 없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감당할 수 없는 운명과 절망 앞에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헬레니즘의 해답은 헤브라이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약 성서의 욥기는 원인 불명의 고통에 관해 성찰하는 책이다. 유일신 여호와 앞에 천사들과 함께 사탄이 나타난다. 여호와가 사탄에게 먼저 묻는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대답한다.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신은 사탄에게 먼저 욥을 보았냐고 물으며, 그의 정직함과 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자랑한다. 그러자 사탄이 반박한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 그 모든 소유물을 풍성히 허락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께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으신다면 욥은 당장 주를 욕할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는 사탄에게 그의 모든 소유물에 관한 이탈권을 허락한다. 덕분에 욥은 모든 소유와 자녀, 건강마저 잃고 원인 모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가 된다. 고통의 원인에는 욥의 잘못도 책임도 없다. 고통의 원인을 그 자신에게서 찾으라며 욥을 비난하는 욥의 친구들을 성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신의 뜻이며, 그 과정에서 사탄조차 궁극적인 신의 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해하고 순종하며 인간의 지혜보다 더 큰 절대자의 섭리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지혜가 된다. 소포클래스가 희곡을 쓴 지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게 고통을 이겨 나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스 비극이 그렇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