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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우 Nov 30. 2020

참사 이후를 목격하기

- 신도 후유키의 <충왕전>

    

- 프랜시스 베이컨의 <십자가 책형을  기초로 한 형상의 세가지 습작> (1941)

[사견]


  최근, 우연히 <충왕전> 1기의 요약본을 접하였다(어릴 적 원본 전편을 본 기억이 있다). 스물 편 가량의 영상을 피로해하며 때로 지루해하며 감상하였다. 내용은 대부분 이렇다. 외골격으로 무장한 두 파이터가 채집통이라는 링 위에 던져진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 그럴싸한 대전 규칙 따위는 전혀 없다. 단 한 가지 주어진 조건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이 전투가 끝난다는 것이다. 


  프로듀서 신도 후유키의 <충왕전> 시리즈는 상당한 히트작이다. 시리즈의 명맥은 5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연이은 패러디 작품은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매혹하였을까. 물론 우리의 관심은 생물의 서열 따위를 알고자 하는, 지적인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결벽증적인 일대일 전투 상황에서 둘 중 누가 상대방을 죽이고 살아남는가 하는 것은 생물적 강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충왕전> 앞에 설 때 우리는 생명의 끔찍한 면모를 볼 것을 기대한다. 죽음 앞에서의 발작, 고깃점으로 해체되어 링 위에 나동그라진 신체, 외부로 튀어나온 장기. 우리의 목적은 이것이다. 참사와 그 이후를 목격하기. 문제점, 이 참사는 경악스럽거나 몸서리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만 <충왕전>은 심장을 평소보다 급히 뛰도록 하거나 근육의 힘을 빼놓을 순 있다. 참사를 목격하는 동안 생명감각은 촉진되는 동시에 탕진한다. <충왕전>은 생명의 원시적 상태(힘겨루기)를 재현하는 동시에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육체를 전시하며 ‘보아라, 생명은 고작 이런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둘 중 무엇도 끝내 고발로 발화되지 않는다. <충왕전>이 보여주는 참사는 언어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전투는 어떤 목소리도 건네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고함치고, 희열하고, 역정을 낼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 잃음은 물론 곤충과 인간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특성 차이(피부의 부드러움과 외골격의 딱딱함)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메스꺼움을 느끼며 도망치고 싶어진다. <충왕전>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적잖이 감탄하고 다음 편의 재생 버튼을 클릭할 것이다. 한마디로, <충왕전>은 꽤 볼만하다. “오늘날에는 오락산업이 추를, 역겨움을 착취한다.”¹ <충왕전>은 때로 불결하고 짜증스러울 뿐 존재를 뒤흔들고 정신을 괴롭도록 하는 요소 따윈 없다. 실로 신도 후유키는 이 시리즈를 다방면으로 발전시켰다. 시리즈 제작을 거듭하며 그는 유명한 격투기 캐스터를 섭외하여 중계를 맡기는 등 이것을 어디까지나 예능으로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능이라는 망토 아래에서 이 참사는 볼만한 것이 된다.

     

  우리는 왜 계속해서 보고자 하는가. 참사와 그 이후를 목격하고자 하는 욕망은 낯선 동시에 익숙한 것이다. 한 가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일련의 ‘라이브리크’²와 같은 종류의 웹 아카이브들을 저널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가. 검열의 제한을 거부하는 그들은 어떤 점에서 대중매체 혹은 저명한 언론사보다 자유로운 보도를 사회에 선사할 수 있지 않은가. 대답은 간단하다. 라이브리크가 호명하는 참사는 어디까지나 익명의 것이다. 그들이 유통하는 이미지 대부분은 익명의 폭발, 전쟁, 교통사고, 소요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육체(혹은 육신이 시체가 되는 과정)를 담는 것에 집중한다. 라이브리크에 유통되는 순간 그들의(아무리 대규모의 전쟁 혹은 테러였을지라도)  이름은 휘발된다. 그들은 이제 한 번의 클릭이면 영원히 반복 재생될 디지털 이미지가 된다. 박제와 방부처리. 이름 없는 참사는 스펙터클일 뿐이다. 그들은 저널리즘이 없다. 라이브리크가 이용하는 것은 참사 이미지를 목격, 소유, 공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뿐이다. <충왕전>과 라이브리크. 전자의 참사가 언어 없음이라면 후자의 것은 이름 없음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이 디지털 이미지화된 참사 앞에서 결코 파산할 수 없다. 감각적 충만과 탈진 사이에서 대류할 뿐이다. 참사 앞에서의 울분, 격정, 흥분은 벡터 없이 발산할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화된 참사는 우리의 관심을 재빨리 해소한 뒤 또 다른 갈증을 유발한다. 감각은 수축과 팽창의 무수한 반복 작업으로 그 탄성을 잃을 것이다. 한때, 참사를 목격하는 일은 존재를 뒤흔드는 실존적 충격을 선사하였고 타나토스를 깨움으로 에로스를 더욱 값지도록(메멘토 모리) 만들었다. 탄성 잃은 정신이 참사의 표정을 감각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참사를 목격코자 하는 욕망은 결국 참사 자체를 전복시킬 것이다.



1)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 지성, 2015). 22.

2) 영국에서 운영되는 동영상 공유 형식의 뉴스 웹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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