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위에 선다는 것의 불온함
- 초보 평론가가 본 예술 평론의 문제
[사견]
솔직해져 보자. 예술 평론에 있어, 기능이라 불러 마땅할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우리 시대의 요구와 여론이 평론가의 필요를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진정 역사 속에서 예술 평론이란 것이 어떤 기능을 가진 적이 있는가? 회화, 게임, 음악, 문학, 영화 등을 평론하는 일 따위가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시사(가령 신기술의 발명이나 전쟁, 기아) 혹은 경제를 평론하는 일의 기능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무언가 말해져야만 하는 곳에 언어를 선물하는 일은 평론가로서 무엇보다 기쁜 임무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예술 평론이 가진 마땅한 기능이란 어떤 것인가를 답하는 일은 곤란하다고 느낀다. 세상에 어떤 예술이 더욱 자신의 존재를 보충해줄 추가적 언어를 필요로 하던가?
예술 평론(혹은 평론 전반)의 태생적 문제점은 평론이란 무언가의 우위에 서는 일이라는 것이다. 모든 예술 평론 작업은 작품의 탄생 사후에 일어난다. 우리는 일단 작품의 우위에 서고 나면 그것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할 뿐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작품과의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평론 혹은 온전히 작품의 아래에서 그것의 탐구를 시작하는 상향 방식의 평론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예술 평론에 한해, 조금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을 허용해준다면, 실로 작품 속에 들어가 살며 그곳의 주민이 된 채 그곳에 어떤 족적을 남기는 식의 평론도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이후에 덧붙여진 수사일 뿐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참된 평론가'의 작업이라든지 하는 것을 정의하는 일을 즐겨하기 때문이다. 평론은 대상과의 수평 혹은 하위에서 발생하려 애쓰더라도 작품의 탄생 사후에 일어난다는 태생적 조건 탓에, 우위를 점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우위에 선다는 것은 불온하다. 그곳에선 최악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수준의 예술 평론은 “이랬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라는 식의,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평론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작품은 이미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강림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 구태여 ‘이 단어를 채용하였다면’ 혹은 ‘이런 촬영 방식을 선택하였다면’하고 사족을 덧붙이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평론은 평론자 자신의 고상한 취향이나 식견을 증명하려는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개인의 호오를 설명하는 식의 평론을 부르는 말로는 차라리 ‘리뷰’ 라거나 ‘감상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물론 그런 욕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나는 <테넷>이 영화관의 바깥에 회전문을 달아 놓는(다시 말해 n회차의 관람을 강요하는 식의), 그 플롯의 복잡성을 포기했더라면 꽤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혹은 <무간도>가 그 이야기를 1편으로 마쳤더라면 자신의 아우라를 잃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래도 나는 그 영화들이 나의 상상대로 편집된 버전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하다. 우리의 욕심이 작품 자체의 탄생을 소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제는 우리가 작품을 평가할 때 작품의 우위에 서고 만다는 것이다. 그 우위의 지평은 비교군이 되기 쉬운 다른 훌륭한 작품이 눈앞에 놓인 곳이다. 동시에 그 작품이 선택했어야 할 다른 방식(가령 촬영이나 캐스팅)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비평보다는 비판이라든가 칭찬 따위의 작업을 하기에 어울리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곳에 서있는 한, 작품이 건네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양의 작품에 따분한 것이라고 이름 붙이고 극소수의 작품만을 봐줄 만한 것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나는 예술 평론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거나 미답의 에덴동산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예술 평론은 분명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짐짓 심각한 어조를 쓰며 리뷰나 감상문 유형의 평론이 가진 저열함을 언급하긴 했지만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자신의 취향을 정의하는 일이나 식견을 확인하는 일도 인간의 삶에 있어 분명 중요하다(물론 그것을 평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지만 말이다). 농담을 하자면, 세상에 나쁜 평론은 없다.
내가 여기서 이성을 유지한 채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는 우위적 위치가 주는 편안함을 포기해야만 한다. 작품의 실체 혹은 적어도 그것의 실루엣을 파악하기 전까지, 우리는 말을 아껴야 한다. 우위적 위치가 주는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아무 말이나 하도록 용인한다. 지금은 언어의 가난이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동시에 너무나 많은 언어의 혼란이 산재한 시대이다(언어가 필요한 곳엔 언어가 없고, 이미 충분한 곳엔 언어를 더욱 덧붙이고자 하는 일련의 운동가 무리가 몰려든다). 우리가 구태여 그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 확실히 해두자. 우리가 그런 짓을 하도록 누군가 허락해준 적도 없지 않은가.
내가 믿는 평론의 1원칙은 그곳에 언어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대충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을 아껴야만 한다는 것이다(물론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배반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단 믿음이 생기면 그때는 참지 않고 말을 꺼내야만 한다). 말을 거두자. 말을 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작품과 함께하며 보내는 데 쓰는 것이 좋을 성싶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위를 포기해야만 한다.
농담을 한 가지 덧붙임.
이 글을 남기는 것은 이 같은 유아적인 논설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라는 믿음이 확연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