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관용어가 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겨울이 오면 고슴도치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일단 거리가 좁혀지면 서로의 가시가 서로의 몸을 찌르기 마련이다. 이제, 고슴도치는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를 가늠하는 법을 배운다.
문제는 이것이다. 다시 서로에게서 떨어진 고슴도치는 더 이상 온기를 느낄 수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온기를 갈구하며 서로를 상처 입히길 반복함에도 모였다 떨어지길 반복할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진정 요하는 것이 자립인가 관계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고민하며 이 우화를 인용하였다. 물론 그것도 중대한 질문이지만 나에게 이 우화는 한 가지 문제를 떠올리도록 한다. 나는 그가 이 문제를 주제로 한 편의 연구를 펴내지 않은 것이 의심스럽다. 그의 노트 한편 어딘가에 이런 메모가 적혀 있는 것을 상상한다.
‘고슴도치가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는 대체 몇 평의 땅이 필요할까.’ 한 인간은 원치 않는 상처를 피하기 위하여 얼마만큼의 땅을 점유해야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삶의 문제다.
나는 현재 전용면적 5.9평의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공간만큼은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그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이 공간의 고용인으로서 내부환경의 질적 관리에 꽤 훌륭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 작은 공간은 실로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 가지 근거를 들자면, 집 밖에 나서는 순간 나의 가장 절실한 소망이 귀가로 바뀐다는 것이다. 나는 문 밖으로 나서자마자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이곳이야말로 외부의 온갖 소음과 원치 않는 노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내가 밤새 고민에 시달리지 않고 잠에 들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이 5.9평이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일 수 있다.
- 스티븐 킹의 작업용 책상, 질 크레멘츠의 사진집 <작가의 책상>에서.
다만 이곳에 살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를 괴롭혀온 소망이 한 가지 있다. 나는 가능하다면 책상을 하나 더 갖고 싶다. 지금의 책상은 일체형이자 빌트인이다. 실용성을 제외한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인데 말하자면 책상 겸, 옷장 겸, 냉장고 겸, 찬장이다. 이것은 벽과 일체화되어 좌우 위아래, 어떤 각도로도 수정할 수 없다. 더욱 짜증 나는 사실은 이 책상 위조차 컴퓨터 모니터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책상이 나의 삶에 필수적인가. 당연하다. 나에겐 읽고 있던 책과 메모장, 필기구, 문서 따위를 아무렇게나 어질러 놓을 수 있어 그 자체가 간이 서재가 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공간만 있다면 마법적으로 모든 업무 처리가 신속해지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물론, 이 책상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상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까지가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간격이 될 것이다. 네 개의 면이 벽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최소 두 개의 의자를 가질 수 있는 책상이 갖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집의 최소 두 배 면적이 필요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와 그의 애견, 아트만.
좋다. 이제 공간이 넓어지니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 이 12평을 환대와 재롱으로 채워줄 반려동물이 있으면 좋겠다. 쇼펜하우어가 그의 애견 아트만에게서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없던 애정을 느꼈듯 말이다. 나는 고양이를 상상한다. 외적으론 영양을 고루 챙겨 먹어 포동포동한 얼굴과 엉덩이를 가졌다. 내적으론 용기와 활력을 겸비하여 인간이 동물에게도 배울 것이 있음을 늘 환기시켜 준다.
사료를 둘 곳과 배변통이 필요하다. 나의 원룸도 거실과 주방,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 공간이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의 집기인 것처럼 동물에게도 그렇다. 생의 최소 단위는 섭취와 배변이다.
또, 그 녀석의 활동력을 감당하려면 캣타워와 장난감도 있어야 한다. 고양이의 습성과 외모는 사랑스럽지만 겨울옷이 털투성이가 되는 것은 매우 짜증 나는 일이니 옷 방도 필요하다. 나는 이제 적어도 온전한 거실과 방 하나, 그리고 고양이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약 4평 정도 될 것이다.
고양이는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며 나도 그와의 교감을 타인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나는 최소 16평의 땅은 점유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양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은 내부만이 아니다. 이제 나의 욕망은 벽을 벗어나 바깥으로 뻗어간다. 나에게 있어 햇빛이 있는 낮 동안 야외에서 걷는 일은 필수적인 원천활동이다. 내가 걷기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은 머릿속의 유난히 소란스러운 생각 벌레가 유일하게 침묵을 지키는 순간이다. 동시에 걷기는 5분 이상 한 곳에 머물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을 가진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명상이다.
가능하다면 이 명상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어쨌든 우리가 간격을 벌리는 이유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함이 아니던가. 다른 보행자가 나의 명상을 방해한다면 내겐 큰 상처가 될 것이다. 나는 전용산책로가 필요하다. 걷기는 좋아하지만 체력이 썩 대단한 수준은 아니므로 왕복 2km 정도이면 적당할 것이다. 나의 몸이 지나가려면 최소 폭은 2m는 되어야 할 것이다.
- 명상의 최대 방해자, 배기음.
다만 걷기라는 명상의 가장 큰 방해자가 외부에 도사리는 한, 이 산책로도 무용지물이다. 이 방해자란 도시의 혈류가 흐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퍼져 있는 매연차의 배기음이다. 이 신경 거슬리는 소리는 사람의 집중을 단박에 깨뜨리고는 유유히 멀어지는 얄미운 존재다. 나는 산책을 하는 시간 동안 배기음에 방해받고 싶지 않고 그들도 자신의 통행이 타인의 명상을 중단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간격을 다시 가늠해야 할 때다.
이 방해자로부터 벗어나려면 나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필요로 할까. 경험해 본 바, 엔진음은 2km 정도 멀리서 들으면 그나마 참아줄 만한 수준의 소리가 된다. 멀리서 들으면 그 소리는 비행기의 매끄러운 시동음과 비슷하여서 조금 기분이 좋은 것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 나는 산책로 외곽으로부터 2km의 원으로 된 면적을 필요로 한다.
- 고심의 흔적.
계산하는 데 꽤나 골머리를 앓았다. 자동차의 배기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소 필요한 면적은 약 12.57제곱킬로미터이다. 결국 내게 필요한 모든 면적을 평수로 환산하면 대략 380만 621평이고 이것은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웬만한 면 단위의 절반 정도 크기다. 이만큼의 면적을 점유할 수 있다면 나는 평생 병 걱정 없이 살 것이다. 조금 양보하여 집 안을 방음처리하면 621평의 땅이면 충분하겠지만 나는 흡음 소재에 둘러싸인 채로 평생을 보내고 싶진 않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얼마나 원대한 욕망을 가졌는지를 알리고자 장황한 공상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간격이란 따지고 보면 한 없이 먼 거리이고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한정되어 있다. 자립이냐 관계냐는 아직 하늘이 푸르고 세계인구가 8억 명이던 시절 독일인의 형편 좋은 고민일 뿐이다. 한 면에 두 명의 인구만이 거주하는 척박한 세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정된 상황에서 더 나은 관계맺기를 고민하는 쪽이 현명하다.
알아보니 고슴도치는 겨울 추위 속에서 가시가 없는 머리를 맞대고 체온을 나눈다고 한다. 고슴도치에게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고 온기를 나눌 능력이 있다면 어째서 인간에게도 그렇지 않겠는가? 서로가 추위 속에서 고통받도록 두지 않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