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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 No Other Choice

의식의 흐름대로 쓴 개인적인 후기

by 밍님


비상구 안내가 끝난 후 화면이 살짝 줄어들면서 어두워질 때 보통 배급사의 인트로영상이 나온다. cj enm movie의 경우 어두운 밤 강가에서 천진한 아이들 목소리와 함께 경쾌한 건반소리가 설렘을 주는 불꽃놀이 영상이다. 인트로 영상이 끝나면 화면에 공동 배급사, 투자사의 이름이 뜨고 곧바로 시작되는 배경음악이나 현장음에 나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영화에 빠져든다.


그런데 어쩔수가없다는 배급사 인트로 영상부터 모짜르트가 흘렀다. 화면은 익숙한 배급사의 인트로 영상이지만 약 20초라도 먼저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라는 것 같았다.

영화 속에 여러 상황, 대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 미술, 장소, 연기 등등등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멋진 평론이나 후기가 많을 것 같다.

며칠간 나도 그런 후기들을 찾아 읽어보는데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써야지 했는데 길어졌네 :)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나는 영화 초반부터 매운 눈물이 났다. 몸 바쳐 일한 직장에서 내쳐진 가장들이 실직 초반 분노와 상실감, 허탈함을 이겨내고자 집단 심리상담을 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어쭙잖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구호를 외치며 지금 이 문장과 다짐을 몸도 기억하라는 듯 턱, 관자놀이에 손가락으로 빠르게 두들기는 모습.

그 외침과 몸짓으로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 했겠지만 하루빨리 이전의 자리를 회복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너무 초조하겠지... 무서웠겠지...
33년 전 나의 아빠가 겹쳐 보였다. 아빠는 1년 이상 변변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우리 아빠는 그때 얼마나 무섭고 초조하고 비참한 마음이었을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 괴로웠을 것이다.

영화 속 엄청난 갈등 상황 중에 "실직당한 게 문제가 아니라 실직 후에 어떻게 대처했느냐가 문제야"라는 느낌의 대사가 나온다. 90년대 초반의 아빠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던 날도 있었던 것 같다. 가족들도 두렵고 초조한 것은 마찬가지다. 실직 후의 변화는 가족 모두가 당사자가 되니까.

'사랑하는 내 가족은, 내가 새 기회를 찾는 동안 온 마음으로 날 지지한다'라는 말이 사실은 아닌 걸 알지만 믿고 싶은 마음으로 외치고 있는 실직 가장들. 매 순간이 처음 겪는 일이지. 실패하고 실패했어도 익숙하지 않다. 매번 새로운 순간과 실패들, 그 나이대에는 처음 겪는 일이라 성인이라 해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어 아빠.

가장 급박한 위기상황 속에서도 유머가 넘쳤던 영화! 남편은 영화를 보러 가기 전 "호불호가 있대"라고 했고 나는"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라면 일단 아름다울 거야!"라고 했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슬프고 씁쓸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타자기가 나와서 이럴 수가!

영화 속 타자기는 Smith Corona Classic12 네벌식 한글타자기로 보인다. 타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반가웠다!!! 박찬욱 감독님도 타자기에 마음 있을까? #고범모 다정한 테토남이었던 그가 실직으로 유약해진 걸 생각하면 여성적인 라인의 올리베티 레테라나 발렌타인으로 타이핑했다면 딱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범모는 사내정치가 보다 성실함의 아이콘일것 같고 영화속에서 낙엽, 늦가을과 어울렸기 때문에 화려함보다는 묵묵하게 깔끔한 타이핑 결과물을 보여주는 브라운톤 스미스코로나 클래식도 어울린다.

그리고 음악.
음악은 정말 최고였다. 영화 시작 전부터 음악이 먼저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데려갔고 마지막 스크롤이 올라갈 때에도 너무 멋져서 비상구로 걸어가는 동안 내가 관객이 아니라 무언가 무대를 끝내고 내려가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대문자 F임 ㅋㅋㅋ) 어린 시절부터 나는 첼로연주를 엄청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 전반에 첼로의 소리가 많이 들린 것이 정말 좋았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가 참 좋았었기 때문에 이번 영화도 기대가 많았는데 기대이상으로 좋았다.


남편은 유만수가 마지막에 로봇들에 둘러싸여 일하다 죽는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유만수가 업계의 경쟁자를 죽임으로써 자기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라 앞으로 동료와의 추억은 남길수 없는, 외롭게 일하는 장면이 나와야해서 끝까지 죽을수도 없는 역할이었을거야. 라고 했다.

박희순이 연기한 캐릭터(이름을 모르겠다.)는 헤어질 결심의 '기도수'느낌이 있어서 제일 빌런에 제일 먼저 죽을 줄 알았는데!

제지공장, 특수지, 나무, 로봇, AI, 돼지살처분, 인간성 등등 장면장면마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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