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은 기억 채우기

by 류완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불안이 마음을 잠식하는 시간이 삶의 길이와 함께 길어지는 것 같지만

비슷한 연배의 주변인 중에는 여전히 긍정적이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삶의 경험이 저마다 다르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간혹 상황이 어려운데도 긍정적인 분들을 만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요즘 힘든 상황을 한 참 풀어놓았습니다.

정성으로 들어주고 괜찮다며 해 뜰 날 올 거라 말해 준 친구가 참 고마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가족 문제로 빚더미에 앉았고 소송 중에 있었습니다.

의자 다리에 발가락 찧은 사람이 불치병 환자에게

죽겠다고 떠든 꼴이 아니었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상황에서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은 친구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에 회복탄력성이 좋은 녀석이거나 아니면 정말 힘들어서 꺼내어 놓기도 싫었거나.


나이가 들면 시선이 넓어질 줄 알았는데 마음은 더 내 아픔만 향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픔만 바라보는 마음은 줄이고 보이지 않는 아픔을 들어줄 수 있는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연찮게 보게 된 심리학 관련 영상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한 기분을 좋은 감정보다 오래 기억한다는 주장입니다.

생존 본능이기에 꼭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불쾌하거나 위험한 경험을 하게 되면 다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경험과 기분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는 주장이었고 나름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꼭 위험한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불편과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단조로운 출퇴근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버스 한 대는 수 십 명, 지하철 한 칸에는 더 많은 사람이 동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환승 경로도 다르고 이용 시간도 다르지만 도시에 산다면

적어도 하루에 수 천명의 모르는 사람들과 동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공공장소 이용 규칙이 있지만 어디에나 어기는 사람은 존재합니다.

꼭 그런 사람들만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방어적으로 타인을 대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불쾌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경험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수 천 명의 모르는 사람 중에 한 두 사람의 불쾌함은 기억하지만

규칙을 지킨 나머지 수 백명의 동행에는 달리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규칙을 지키기 위해

작은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며 스스로 잘했다고 다독일 수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나와 동행해 준 이름 모를 이웃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서로 주고받았으니 그걸로 퉁치자고 한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받은 작은 친절은 잊지 말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신호가 없는 건널목에서 나를 보고 멈춰 선 운전자, 건물 입구의 커다란 문을

잡고 기다려 준 누군가, 인기척을 느끼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둔 사람,

우리는 이런 친절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마음 깊이 담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미소로 감사를 표현하고 그 친절을 좀 더 오래 마음에 담아 봅시다.

친절에 대한 감사가 내재화되면 될수록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친절은 작고 느리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할 수 있는 확실한 위로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기억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외롭거든요. 아니면 저만 그런 거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불편한 기억은 나를 더 외롭게 만듭니다.

위축되게 만들고 친절을 방해합니다.


다정함도 건강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 건강에는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마음을 좋은 기억으로 채우고 나쁜 기억은 빠르게 지워나갑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다정하게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러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다정함은 분명 힘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지우지 않은 오늘의 좋은 기억이 내일의 날 더 친절하게 이끌어 주리라 믿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태워버리던가 그냥 쓰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