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얼마나 사랑하냐는 질문에 더 이상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쯤 결혼을 했다. 아내는 11년 가까이 연애하는 동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물었고 나 역시 지치지 않고 식상한 대답을 했다. 하늘만큼 땅만큼. 원을 하나 그려봐. 이따위 대답을 하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 적절한 답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 창의력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오기가 생겨 가끔씩 차마 글로 밝히기 어려운 무리수를 던지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게 뭐야. 였다. 그렇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 그러다 뒤늦게 어느 방송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있다고 한다.
네가 그런 질문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아. 정녕 이게 정답이란 말인가. 무슨 맥락인지는 알겠는데, 나는 오그라드는 손발을 지켜낼 항마력이 부족해서 이런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꺼낼 자신이 없다. 말을 못 하겠으니 귀한 정답을 알아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답을 못하겠다고 그냥 끝날 일이 아니다. 아내는 결혼 후에도 종종 사랑의 크기를 표현하시오.라는 창의력 시험을 내게 꺼내곤 했으니까. 어떻게든 나만의 답을 내긴 해야 했다.
11년에 가까운 시간을 연애하고 치른 결혼식. 결혼 준비 중에 터진 코로나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화 "어벤저스-인피니티 워"에서 악당 타노스는 "소울스톤"을 얻으려면 가장 소중한 것 하나 내놓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사랑하는 수양딸 가모라를 제물로 바친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진리를 비정한 빌런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모든 것을 쥘 수 없다. 연애와 결혼도 마찬가지다. 연애를 할 땐 내가 가진 자유의 일부를 포기한 대가로 연인과의 달콤한 시간을 얻는다. 결혼을 할 땐 내가 홀로 누렸던 더 많은 자유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가족이 주는 기쁨을 얻는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결혼을 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들의 크기였다.
연애 시절엔 단지 우리의 데이트를 위해 서로의 시간을 내어주어야 했다면, 결혼 후에는 늘어난 가족을 위해서도 시간을 내어야 했다. 아내에게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그리고 내게는 장모님과 장인어른, 두 처남이 생겼으니까. 게다가 항상 집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서로의 귀가시간을 앞당겼고 그만큼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아기가 태어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테다. 그러나 내가 쥐고 있던 것을 포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다.
연애가 배려라면 결혼은 헌신이다.
연애가 약간의 양보와 마음 씀씀이로도 가능했다면 결혼은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뛰어드는 책임감이 필요했다. 법적 관계도, 혈연관계도, 가족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진 못한다. 피를 나눴다고, 혹은 서류로 묶였다고, 결코 진짜 가족이라 부를 수 없는 수많은 폭력과 방치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가족을 이루는 진정한 힘은 무한한 책임감이다. 내가 이 사람을 무한히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적어도 그는 나에게 가족이 된다. 여기에 상대도 나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비로소 완전한 가족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책임지려는 관계. 이렇게 책임감이 가족의 본질이라면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도 설명이 된다. 끝까지 책임지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울 것이며 사회 속에서 사랑받을 수 있도록 키우겠다는 각오가 작은 생명을 우리의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집에 산 지 1년이 되어갈 때쯤 오랜만에 아내가 물었다.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냐고. 아. 그냥 알고 있는 정답을 말할까 잠시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위기를 잠시 모면하자고 커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단 지난 1년의 신혼생활을 생각해보며 진심으로 대답해주고 싶었다. 내가 아내를 생각하며 느끼는 사랑의 크기를, 아니 책임감의 크기를 표현해주고 싶었다. 내 창의력, 어휘력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결과가...
평생 똥오줌을 받아줄 만큼 사랑해.
아. 아내의 표정이 애매하다. 그냥 정답을 말할걸 그랬나. 똥오줌보단 대소변이 나았을까. 말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