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입맛 없는 아내를 위한 연어장

힘들어도 요리를 해야 하는 이유

by 사이의 글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 멈췄다. 아내가 무릎 수술이 필요해 입원을 한 것이다. 우리는 병실에서 며칠을 보내게 되었는데, 수술 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편보다 끼니가 문제였다. 아내는 입맛이 없었는지 혹은 병원 음식이 별로였는지, 많지 않은 양의 병원 밥도 제대로 먹질 못했다.


연어장이 먹고 싶어.


혼잣말처럼 불현듯 튀어나온 마음의 소리였다. 아내는 연어로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연어장을 손에 꼽는다. 특히 이렇게 입맛이 없을 때 특효약인 메뉴가 연어장이다. 한 입 물면, 짭조름한 간장이 고소한 기름층과 함께 연어의 부드러운 결을 따라 입안에 퍼지면서 밥을 부르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줄게.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고, 아내는 그 말에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최근에 요리를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자주 해놓은 상태였으니까.






지난번 격렬하게 김밥을 만든 뒤, 회의감에 빠졌다. (4화 참조) 요리는 나와 안 맞는 게 아닐까. 역시 그냥 사 먹는 게 맞는 것 같아.


손도 뭉뚝하고 섬세하지 못해서 손으로 만드는 걸 잘해본 경험도 없다. 요리에 필수 능력인 미각도 문제다. 상한 음식도 구별 못하고 곧잘 먹는 미각을 소유했으니 말이다. 양에 대한 감각도 떨어져서 적당량을 가늠하지 못한 채 손질한 재료는 냉장고에서 상해갔다. 손이 느려서 요리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재료는 알뜰하게 쓰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여기에 다시 일에 허덕이는 생활이 시작되자 도시락을 싸겠다는 결심도 금방 식어갔다. 김밥이 초보자가 하기에 손이 많이 가는 메뉴라서 어려웠을 거라고, 더 쉬운 요리를 해보라며 아내는 위로했으나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거의 모든 음식을 사 먹는 일상이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연어장을 해주겠다고 선뜻 말한 것은 병실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지난 아내의 생일에 미역국도 못 끓여주고 넘겼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지난 아내의 생일은 서로 다른 날에 양가 가족들과 함께 챙겼다. 무난히 지나갈 뻔했던 생일 축하 자리에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이는 아버지였다. 화기애애했던 식사 중에 눈치 없는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 다정한 말투로 며느리에게 물었다.


미역국은 먹었니?


아. 아버지 좀 가만히 계세요.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현재의 불안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미역국이란 단어에 면목없는 남편은 모두의 눈치를 보며 좌불안석이 되었고, 분위기를 느낀 가족들은 웃으며 나를 나무랐다. 아내는 요즘 누가 미역국을 다 챙겨 먹느냐며 괜찮다고 했으나, 속마음까지 괜찮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결혼 전까지는 생일마다 장모님이 끓인 미역국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챙김을 덜 받는 생활이 누군들 반가울까.


요리를 잘하든 못하든, 요리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해야만 하는 순간. 소중한 이가 생일을 맞았을 때 미역국을 끓이는 것, 아플 때 죽을 끓여주는 것, 입맛이 없을 때 가장 좋아하는 메뉴를 만들어 주는 것. 요리를 잘하는지, 사 먹는 것보다 효율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당신을 위해 요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으로 규정하고,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노동 (labor), 작업 (work), 행위 (action). 인간은 노동으로 삶을 유지하고, 작업으로 세상을 만들며, 행위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고 본 것이다. 어쩌면 집에서 요리를 한다는 사소한 활동도 노동이자 작업이면서 행위일지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자, 식탁 위 공통된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면서, 존재 이유와 상호 돌봄의 관계를 쌓아가는 행위.


그러니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잘하지 못하더라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제목 없음-1 복사.jpg
제목 없음2.jpg



아내는 퇴원했고,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연어장. 어떻게 만들지?


찾아보니 레시피는 간단했다. 진간장, 맛술, 물, 설탕 대신 스테비아를 넣고 간장을 끓였다. 감칠맛을 위해 가쓰오부시 가루를 뒤늦게 살짝 넣었다. 간장을 식혀두는 동안 두툼한 모양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연어를 큐브처럼 썰고, 양파도 채 썰어두었다. 얼마 뒤 식은 간장을 붓고, 몇 시간 숙성. 그게 끝이었다. 의심이 들 정도로 간단했다.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안 해봤을까.


연어를 한 입 먹은 아내는 밥을 꺼내고, 금방 연어장과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입맛이 없던 그 사람은 어디 갔느냐는 말에 한 번 째려보더니, 이내 너무 맛있어서 그렇다며 또 만들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연어 사이즈가 너무 작은 걸 사온 탓에 한 끼 먹을 양 밖에 안 되었던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 정도 난이도면 얼마든지 또 해줄 수 있겠다 싶어, 다음날 한 번 더 만들었다.


잘하지 못해도 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나에겐 요리가 그렇다.




keyword
이전 04화요리 초보 남편의 김밥 말기 대환장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