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근본은 밥
쌀을 잘 안다고 믿었다. 지금껏 비운 밥공기 수를 생각하면 모를 리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믿음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여느 때처럼 바닥을 보인 쌀을 주문하려고 인터넷 창을 켰던 날,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품종.
늘 시키던 쌀을 장바구니에 담다가, 스치듯 발견한 품종이란 단어에서 쌀에도 종류가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익숙할 뿐인데 잘 안다고 착각했구나. 그 길로 국내 쌀 품종 정보를 찾아보았다. 신동진, 진상, 알찬미, 진미, 오대, 삼광, 일품, 해들.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주르륵 나오는 이름의 쌀은 저마다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찰기도, 식감도, 향도, 단맛의 정도도 차이가 있던 것. 그러다 시선을 붙잡은 쌀이 바로 골든퀸 3호였다. (영어 이름이지만 국내 품종이다.)
밥에서 은은한 팝콘향이 납니다. 밥에서 팝콘향이라니. 이 표현을 보고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부드럽고 탱글한 식감이 매력이라 하고, 씹을수록 올라오는 단맛과 감칠맛도 다른 쌀보다 진한 편이라고 했다. 이 쌀을 먹기 시작하면 한동안 푹 빠지게 된다는 후기도 보이니 도저히 안 먹어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주문한 쌀이 집에 도착했다. 개봉하자마자, 생쌀에서 풍기는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주방에 퍼졌다. 참을 수 없어 빠르게 밥을 짓고 첫술을 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쌀의 향과 맛에 푹 빠지고 말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냥 맨밥만 먹어도 입맛이 도니, 자연스럽게 외식이나 배달보다 직접 지은 밥과 반찬을 찾게 되는 것 아닌가. 갓 지은 밥이 기다려지는 마음을 처음 느꼈을 때 깨달았다. 집밥을 회복하고 싶다면, 먼저 밥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한식의 근본은 밥이다. 밥을 중심으로 끼니가 구성된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선조들의 쌀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큰 밥공기를 쓰면서도 고봉밥을 몇 그릇이나 먹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인은 식사라는 말 자체를 밥 먹는다고도 표현한다. 우리에게 식사는 밥, 즉 쌀을 먹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밥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무오연행록>에 기록된 조선 중기의 문장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일화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정구는 명나라 재상의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집에 찾아가니 재상은 외출 중이어서 그만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재상 집안사람들은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그를 붙잡고 먹을 것을 내어왔다. 그런데 요기를 한 이정구가 식전이라 말하며 돌아가려는 것 아닌가. 그러자 그들은 다시 떡과 과일을 대접했다. 그것을 먹고도 이정구는 또다시 식전이라며 가겠다고 했다. 재상 집안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배가 고파서 식전이라고 하는 줄 알고, 오전에만 네다섯 번 음식을 대접했다. 하지만 이정구는 끝까지 식전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재상은 자신의 불찰을 책망했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밥을 먹지 않으면 끼니를 걸렀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실을 미리 식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실수라면서.
하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우리의 식사에서도 쌀의 비중은 점점 줄고 있다. 1994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20.5kg 이었지만, 2024년은 55.8kg을 기록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한 가지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집밥의 감소'이다. 사 먹는 일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메뉴도 다양해지고, 끼니에 쌀이 아예 없는 날도 적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집밥을 잘 안 먹는다는 것이 곧 밥을 안 지어먹는다는 의미라면, 한식의 근본인 밥부터 잘 짓는 것이 집밥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아닐까.
아내에게 솥밥을 해주겠다고 공언했다. 날짜와 시간은 일요일 점심으로 정했다. 아내는 내심 못 미더웠는지, 정말 할 수 있겠느냐고 평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확인했다. 솥은 뭘 쓸 건지, 뭐가 들어가는지, 태우지 않을 수 있는지, 이것저것 묻곤 했다. 그때마다 알아서 잘해줄게.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당연히 내 인생에 솥밥 만들기 처음이다. 요리 초보자에서 중요한 것은 기세다.
막상 그날이 다가오자 점점 초초해진다. 이럴 땐 일단 유튜브 선생님을 소환한다. 솥밥을 입력하고 스크롤을 계속 내리다가 '명란 솥밥'이란 단어에 멈추었다. 명란. 왜 '명란'에 시선이 멈췄을까. 아마도 오래전 어느 레스토랑에서 아내가 '명란 파스타'를 무척 맛있게 먹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명란이 들어가서 맛있던 것인지, 생면이었던 파스타 자체가 맛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머릿속에 '명란은 맛있어'가 각인되어 있었다.
일요일 점심, 늦잠 자는 아내를 깨우곤 요리를 시작했다. 먼저 씻은 쌀에 물을 1:1 비율로 넣고, 멸치 액젓 한 스푼, 말린 다시마도 한 조각 넣어 간을 한다. 이제 30분간 불린다. 기다림의 시간.
그 사이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낸다. 쪽파와 부추를 잘게 썰고, 마늘과 표고버섯도 썰어둔다. 쌀을 불린 지 20분 정도 되었을 때, 버터와 명란을 준비한다. 달궈진 냄비에 버터 한 조각을 넣고 녹인 다음, 명란을 넣어 노릇하게 익힌다. 익힌 명란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두고, 남은 버터에 표고버섯과 마늘 그리고 간장 한 스푼을 넣어 볶는다. 표고버섯과 마늘이 어느 정도 익으면 이제 준비한 불린 쌀과 물을 냄비에 모두 붓는다.
자. 이제부터 중요하다. 솥밥의 핵심은 불 조절. 여기서 실패하면 설익거나 태우고 만다. 일단 잘 저으면서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물이 팔팔 끓으면 뚜껑을 닫는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 중불로 6분, 약불로 6분. 이제 불을 끄고 뚜껑을 열어 부추와 쪽파를 밥 위에 올린다. 초록 잔디가 깔린 것 같은 냄비 안에 익힌 명란도 올리고, 들기름을 한 바퀴 살짝 돌리듯 넣는다. 얼른 뚜껑을 닫고 이제 10분간 뜸을 들인다.
너무 맛있어. 아내의 반응은 대만족이었다. 요리에 칭찬받는 일은 아직 어색해서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들기름을 조금 더 넣을까, 느끼할 수 있으니 김치랑 먹어. 그러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요리로 흘렀다. 어떻게 명란 솥밥을 골랐는지, 쌀의 식감이 좋다든지, 불 조절은 어떻게 했는지, 이 메뉴는 표고버섯향이 중요하다는 식의 말을 나누다가, 요즘 인기 있는 영화와 일터에서 있었던 일까지,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 시간이 꽤 오랜만이었다.
회복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근본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근본이 잡히면 나머지는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밥의 회복은 밥을 맛있게 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부부의 시간을 회복하고 싶으면 함께 집밥을 해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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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퀸 3호는 히말라야 야생벼와 국내 벼를 교배시켜서 20여 년에 걸쳐 개발한 품종인데, 뒤에 붙은 3호는 세 번째 개량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명란 솥밥 레시피는 '1분요리 뚝딱이형' 유튜브 채널 레시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