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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숨 쉬는 생명의 교감

by 캐리소

오늘 하루라는 공기가 매일 피어나는 생명에 닿는다.

그러면 생명은 깨어나고 움직이면서 부여받은 하루치의 삶을 살아간다.

현관을 나서서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햇살이 옆집 꼬마처럼 반갑고, 졸졸이 인사하는 소박한 화분들에는 갖가지 화초며 푸성귀들이 가득하다.

하루라는 시간 안에 의미 없는 생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지 못할 땐 공허에 텅 빈 얼굴을 하게 된다.





오늘 만난 생명은 몸통이 잘린 벚나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무엇에 이끌리듯 벚나무 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슬며시 빼 주머니에 넣었다.

나무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인간은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댄다.


벚나무에 누런 덩어리가 보여서 손을 뻗는다. 살짝 만져봤다가 깜짝 놀라 손가락을 뗀다. 부드러운 단단함 속에서 자신의 몸을 짓이겨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벚나무도 소나무처럼 진액을 내는구나. 그렇게 자신의 몸에 난 상처에 스스로 진액을 만들어 치료하는구나.


나무 곁에 가면 나무의 품이 정신의 코로 맡아진다.

단순히 그의 향기가 아니라 그가 다른 생명에게 내준 곁.

넓은 아름드리 품 안에 나를 그대로 품게 둔다.

나무는 커다랗고 나는 작지만 둘 다 부족함이 없다.




20대는 생이 막연하게 느껴져서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것들을 해치우고 목적 없이 나아가는 시간이었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삶의 육하원칙을 점검하지 못하고 그저 살았다.

아무도 '삶이 이런 것이다'라는 팁을 주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흘러갔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분주한 삶을 거울삼아 내게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셨고 나는 다가오는 운명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맞닥뜨렸다. 어쨌거나 살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것도 나 자신만으로!



50이 넘어 지나간 시간을 떠올려본다. 어떤 기억은 내 시나리오로 각색되어 있었고 어떤 일은 진실과 거리가 있는 채로 굴절되어 있었다. 삶이 밀어내면 밀리고 당기면 끌려오면서 의식은 듬성듬성해지고 인식은 말라붙어 더욱 딱딱해졌다.


일 년 전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다른 차원으로 건너온 것 같다.

갇힌 인식에서 내려와 말랑한 길을 걷는다.

희미하게 드러난 내 발자국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다.

차원을 넘나드는 내면의 시공간이 이상하고 새롭고 갑작스럽다.

분명히 우주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고 준비하고 있었겠지만 내가 인식하기 시작했으므로 이 일들은 이제야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지금 나는 흐려터졌던 삶의 자리로부터 나를 선명하게 세우고 더 깊게 새로워질 자리로 옮겨놓는다.

딱딱한 인식을 쪼개 버리고 의식을 다시 세우기 위한 반죽을 새로 치대기 시작한다.

아기처럼,

어린아이처럼,


미세한 일상을 나노단위로 쪼개 그린다.

매일 내 주변에 있는 살아있는 생명들을 들여다본다.

그럴 때, 창조의 생명은 깨어나고 움직이며 부여받은 하루치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내 안에서 그들은 그들 안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모든 것을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Photo by unsplash



문득 생명을 생각하면 눈가가 뜨거워진다.

같은 종이 아니어도 생명인 나와 또 다른 생명인 네가 교감하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가늘게 붙어있는 숨이라도 생명은 생명을 살린다. 자신의 세포를 활성화시켜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다른 생명도 받아들인다.

내 눈에는 바삐 움직이는 개미만 보이지만 수많은 생명이 벚나무를 지나갔을 것이다.

벚나무 안에 여러 종류의 생명이 움직이고 꼬물거리고 수많은 시간을 흔들리면서 다른 생명과 공생한다.


상처 입고 또 상처 입으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면서도
생명의 본분을 다하는 나무를 본다.
자연을 마신다.



높다란 가지 저 끝에 새들이 날아와 나무랑 같이 논다. 노랫소리가 펄펄 날리는 눈처럼 흩어진다.

바람의 음률과 새들의 화음이 귓가를 간질이고 풍경소리 같은 노란 햇빛도 그들의 화음을 가느다랗게 거든다.

작은 생명들의 교감에서 나는 일체성을 본다!

하나가 된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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