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끝까지 배우는 할머니

by 캐리소


Photo by pixabey


몇 달 전 딸과 사위, 두 손자가 살고 있는 부산에 다녀왔다.

가는 도중에 대전에 있는 둘째에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 장난해? 내가 모를 줄 알고 슬쩍 언니네 가는 거야?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대전 내려서 나를 보고 가야지. 그냥 가는 게 어딨어? 아니면 나 진짜 삐져서 엄마랑 안 논다!!"

둘째가 귀엽게 징징거리는 바람에 유쾌해진 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갈세라 '엄마가 비싸니까 미리 예약해야 해' 하고 대답한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열차는 보드라운 그리움도 배어있지만, 깊은 그리움 하나마다 깨처럼 박힌 고소한 피곤이 짐작된다. 피곤하지만 돌아와 쉴 곳이 있는 여행자의 안도, 여행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여행자가 된다. 가끔은 재미있는 도장 깨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보고픔의 고충을 염려하기도 하지만 내게 이런 적당한 거리와 관계의 간격은 서로에게 바람구멍이다. 촘촘한 집들 사이를 휘돌아 중정을 지나가는 바람.

그러니 가족이어서 상처가 되는 가까움의 숙명 속에서도 서로를 진지하게 품어볼 수 있는 틈을 준다.




두 손자가 커가는 모습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오래전 어린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키운 일이 1차원이었다면, 사춘기 아이들과 똑같은 부피로 자랐던 부모의 자리는 2차원, 결혼한 자녀가 낳은 아이들과 나누는 시간은 3차원에 가깝다.

책임을 벗어난 입체성에서 더 많은 교감이 가능하고 서로의 깊은 세계를 만나기도 다.



하루는 꼬꼬마 1학년 둘째 손자가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며 마구 떼를 쓰길래 눈을 맞추어 붙잡고 앉아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먼저 물었고,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형이 얼마나 곤란한지 설명하고, 네가 싫은 건 형도 싫은 것이니 형이 싫어하는 건 하지 않는 게 규칙이라며 차근차근 알려줬다.


엉엉 울며 내 말을 듣던 손자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더 크게 울음보를 터뜨린다. 하...


나는 손자의 마음도, 나의 딸리는 전달력도 헤아리지 못하고 훈계를 했다.

(할머니의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재밌다)

사실 훈계는 내가 아이들에게 받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이들이 내게 보여준 것들이 더 진실되므로 그 진실에서 배운다.

그럴 때 할머니는 깨갱해야 한다.


형이 애지중지했던 물건을 몰래 책가방 속에 넣어 학교에 가져간 둘째 손자.

친구들에게 보이며 자랑하다가 그걸 달라는 친구에게 홀랑 주고 돌아왔다.

잠시 황당해하던 첫째는 동생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딸과 사위는 첫째에게 화가 나면 동생에게 화를 내도 된다고 했지만 첫째는 동생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고, 속상하지만 물건보다 동생이 더 소중하다고 말한다.

이 녀석, 대체 뭐지?





손자들은 자기 생각에 솔직하다.

'집에서는 엄마 목소리가 아빠보다 더 크다'라고 학교나 학원선생님들께 동네방네 알려드리고, 매일 퇴근 후 어깨깡패를 만들려고 아빠가 덤벨을 들고 우스운 포즈를 연습한다고 직접 몸과 소리로 재현해 준다. 나도 그들과 같은 레벨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손자들은 동시에 방바닥을 뒹구르며 낄낄거린다.


손자들은 말한다.

우리 할머니가 달라졌다고.

무섭고 혼내던 할머니가 야단을 치면서도 설명해 주니까 좋고 전보다 친해진 것 같아 좋단다. 지들이 시나브로 자라서 그렇다는 사실은 모른 체. 그래서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고 서로의 수준이 비슷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생각의 눈높이가 비슷해지기도 하지만 일단 서로를 사랑하는 게 옵션이어서 그렇다는 것도 모른다. 아니, 사실 그들이 더 잘 안다. 내가 이제야 뒤늦게 그걸 깨달은 것뿐이다.


손자들은, 사랑하려고 준비된 아이들 같다. 서로 만나면 안아 주려고, 자신들의 소소한 시간도 할머니와 보내려고 준비한다.

내가 실수해도 사랑한다. 때론 서로가 못마땅해도 결국은 사랑해! 하고 헤어진다.

종종 나는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들과 헤어진 다음 조용한 시간 속에서 부끄러워진다.


할머니가 품어야 할 아이들인데 오히려 내가 손자들의 품에 안긴다.

내 아이들과는 이런 입체적인 관계를 조화롭게 갖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이들과 쌍방이 아니라 나만의 일방이었고 그래서 관계의 균형을 잡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내 아이들과의 결핍이 손자들과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만든 필수 요소일지도 모른다.

불만족과 만족감은 늘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는 내가 서있는 위치가 n차원이나 무한 차원의 공간으로 넓어질지도 모른다. 손자들은 점점 성장할 것이고 또 다른 손자 또는 손녀(이 구절에서 터지는 행복, 제발 우리에게 와 다오!)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도 자꾸 새로워지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들이 넓어지면 나도 따라가고 그들이 깊어지면 나도 그 깊이를 함께 나누고 담고 퍼뜨리는 확장으로 나아가고 싶다.


삶을 꾸리고 이끌며 자신을 주는 방법을 손자들에게 배우고 있지만,

그래서 사랑으로 부끄러운 할머니지만,

배움과 성장을 멈추지 않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keyword
이전 25화회전하는 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