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1 DAY 1_am 10:00
해외여행을 좋아하고, 적지 않게 다녔으면서도. 더군다나 그 흔하다는 터뷸런스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서워한다. 특이한 것은 창가 좌석에 앉을 경우 그 공포가 더 커진다는 것인데, 창밖이 보이면 그러니까 비행기가 각도를 바꾸고 하는 어떤 움직임을 확인하면 나의 비행기 공포증은 상한가를 치고도 또 쳤으며 심장은 저 혼자 롤러코스터에 타버린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장거리 비행이 아닐 경우에는 창가 자리를 선택했다. 왜냐. 남들 다 보는, 다 찍는 하늘을 나도 보고 싶고, 찍고 싶으니까. 어떤 시절의 나에게 여행이란, 나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어떤 것에 훨씬 가까웠다. 구체적으로 언제까지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이 욕망은 포기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특정 시기에만 발현하는 공포가 내 안에 늘 상주하는 욕망에 굴복했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말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땐 ‘남들에게 보이는 나’ 혹은 ‘남들처럼’이 ‘내가 좋아하는 나’보다 더 중요했다. 여전히 ‘타인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다만 그 어느 시절을 넘긴 나는, 설령 타인의 평가가 내가 기대한 바와 다르거나 못 미칠지라도 들을 건 듣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냥 흘려버린 건 흘려버릴 수 있게 됐다. 남들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고, 나 스스로 상처로 여기지 않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여행도 나만의 것으로 점차 변해갔던 것 같다. 그럼 대만 여행에서 내가 앉은자리는 어디였을까? 전과 다름없이 창가 자리였다. 포기하지 못한 그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무섭지만 이제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는 법을 알게 됐다.
누구나 비행시간에 대처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도 여러 시행착오 끝에 찾았다. 아주 특별한 방법은 아니고 남들도 많이 하는 행동이다. 바로 책 읽기. 가끔 창밖을 보고 그 나머지 시간은 책에만 집중하는 것. 비행기가 어떤 상태인지 되도록 눈치채지 않기 위한 노력이랄까. 그래서 어떤 여행을 추억하면 저절로 따라 나오는 책도 있다. 제주도 여행하면 이병률 작가의 <끌림>이 떠오르고, 튀르키예 여행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기린의 날개>가 생각나고 하는 식이다. 앞으로 대만 여행은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가 차지할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어떤 문장을 메모했더랬다. 내가 앞서 말한 언젠가 내려놓은 기대에 관한 말인 것 같기도 했다.
기차가 움직일 때 송은 문득 내가 나빴지,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나쁘지 않음에 대한 기대, 이를테면 속죄 같은 것은 그 공허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행을 떠나기 전 목표는 딱 하나였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지인 홍마오청, 그 푸르름이 가득한 공간과 진리 대학에서 단수이까지 이어지는 주변 일대를 그냥 걸어보고 싶다는 것. 그런데 대충이라도 일정 비슷한(!) 것을 정하다 보니, 견물생심이라고 왠지 가야 할 것만 같은 곳이 너무 많았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타이베이에 간 사람들은 대체로 선호하고 만족도 또한 높다는 버스 투어. 예류 지질 공원, 스펀 천등 거리, 스펀 폭포, 진과스, 지우펀을 하루에 둘러보는 여행 상품으로 이른바 코스에 따라 ‘예스지’, ‘예스폭지’, ‘예스폭진지’, ‘예스진지’라고 불리는 관광 명소를 나는 어떻게 할 것 인가였다. 버스 투어는 가성비 면에서는 최고였다. 둘러보는 개수에 따라 대략 1만 원에서 2만 원으로 현지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단번에 섭렵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온종일 투자할 수 있는 일정이 나에게는 단 이틀뿐이라는 것. 그러면 하루는 원래 목표로 했던 곳을, 다른 하루는 버스투어를 하면 됐다. 그렇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예전의 나라면 좋아했을 선택지였다. 남들이 가본 곳을 나도 다 가보는 여행이 될 테니까. 그런데 막상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몰랐다.
둘 중 하루는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는 예보가 마음을 멈칫하게 한 시작이었을까. 맑은 날 1순위인 홍마오청에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비 오는 날 버스를 오르내리고 거기다 비를 맞아가며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껴서 관광지를 돌아다녀야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왜 대만에 가고 싶었지?’
‘저 관광지들을 가고 싶어서였던가?’
나는 그냥 걷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싶기도 했고, 어떤 생각에 잠겨 걷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버스 투어는 과감히 삭제해도 될 계획이었다.
버스 투어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정리한 나는 오랜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대신 넣었다. ‘비 오는 날’ 현지 카페에서 책 읽기. 물론 ‘비 오는 날’이라는 디테일은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집어넣은 조건이다. 하하. 너무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을 골라 캐리어에 넣었다. 전에도 읽은 적이 있었던 작가의 책으로 내가 그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랑 이름이 같아서였다. 동명이인 작가의 책을 읽으며 여행 버킷리스트를 완성한다는 상상. 만약 정말 현실이 된다면 멋질 것만 같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음,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여행이란 게 원래 뜻대로 잘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나라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날씨가 눈치 없이 너무 제멋대로인 탓일까.
아니 어쩌면 대만 정부가 주는 여행 지원금 ‘럭키 드로우’에 덜컥 당첨이 되어버린 게 이 여행의 향방을 모두 바꿔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랬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찾아오고 대만 여행 계획은 완전히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