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3 DAY 1_pm 01:00
행운을 거머쥘 주인공이 나일 수도 있다는 분명한 확률이 있었음에도 지레 포기하는 마음이었던 나는, 럭키 드로우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 공항 ATM에서 환전부터 했다. 환전한 돈은 4천 대만 달러. 형식적 3박 4일, 실질적 2박 3일간 쓰기에 넘치지는 않을 적당한 수준이었다. 쇼핑은 하지 않을 거였으니까. 그런데 럭키 드로우 당첨으로 받은 5천 대만 달러가 충전된 이지카드(버스, 지하철, 기차, 택시, 편의점 등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대만의 대표적 교통카드)까지 더하면 총 9천 대만 달러. 계획의 두 배 이상 되는 돈인 40여만 원이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돈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것도 너무, 정말, 많이 좋은 일. 유효 기간 만료 전 마일리지를 쓰기 위해 백수인 상태에서 ‘힐링’이 필요하다며 다소 무리해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했다. 마일리지가 있으니 다른 여행보다는 경비를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소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행운을 대비하지 못한 시점부터 계산은 빗나가기 시작했고, 설령 시작이 그랬더라도 충분히 오산한 숫자를 바로잡고, 심지어 예산을 줄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 아니, 그러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럭키 드로우 결과를 확인하고 환전을 한다. 분명 나도 그랬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돌연 선택을 바꿨을까?
나에게는 오래된 지병(!)이 있다. 이른바 유비무환 정신으로 과하게 포장된 ‘거대불안증식병’. 이 병은 혹시 모를 일에 대처한다는 핑계로 부정적 생각을 끝도 없이 하고야 마는 증상이 가장 대표적 징후이다. 내가 없던 불행까지 만들어 매일 안고 살아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행은 원래 계획대로 잘 안 되는 법이니까, 하고 넘겨버려도 그만이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라며. 겉으로는 완벽하게 그렇게 보이도록 감춰진 나의 사고방식은 사실 그와는 정반대다. ‘나쁜 게 나쁜 거잖아’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이 여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최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닌 최악을 막기 위해 사는 삶. 나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고군분투했다.
럭키 드로우와 ATM은 거의 나란히 붙어 있었다. 행동으로 옮길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럭키 드로우냐, 환전이냐의 갈림길을 마주한 내 머릿속은 이랬다.
‘이번에 처음으로 만든 트래블 카드가 불량이라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어.’
‘지금 ATM기에 사람이 하나도 없네? 한번 테스트해 볼까.’
‘근데 럭키 드로우 확인하고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한데...’
‘럭키 드로우하고 나서 환전하려면 사람이 너무(negative) 많을 거야’
‘그때 환전하려다가 내가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지?’
‘아마 내 뒤에 사람들이 짜증 내겠지?’
‘나는 (처음이라서) 실수를 하고 말 거야.’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
‘내가 못 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 창피하잖아’
심리학 개념 중에 ‘병적 꾸물거림(morbid procrastin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선택이나 과제를 앞두고 두려움과 부담감이 클 때, 당장의 업무가 아닌 다른 것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꾸물거리는 것으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일종의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걱정과 스트레스, 또 계획과 생각이 넘쳐나지만 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걸린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탈 벤-샤하르 교수는 그 이유를 이런 유형의 완벽주의자들은 결과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완벽히 해내지 못할 일에 대해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때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방어기제로 활용한다고 한다.
‘게으른 완벽주의자’. 나를 설명하는 완벽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웬만해서는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좋았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재미있었다’로 분류되는 기억들이 많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분류할 수 있게 되었을 뿐. 혹은 그런 시도만 했을 뿐. 현재진행형일 때는 불안하고, 괴롭고, 슬프고, 힘듦이라는 감정이 늘 우세했으므로 대부분 부정적 경험으로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의 방향을 움직여보려는 시도보다는, 그 어떤 시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부정은 물론 긍정의 마음조차도 생기지 않도록 만드는 것. 좋아지는 것이 아닌 이보다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여겼던 것 같다.
‘혹시나 안 되면 어떡하지?’
‘그럼 안 되는 일이 없도록 아무것도 하지도 말자’
원래대로라면 그랬어야 했는데...... 그런데 왜 하필 대만 여행에서는 게으르지 않았을까. 하하하. 이후의 이야기에서 밝히겠지만 실패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으로 ‘재빠른 완벽주의자’가 되어 혹시 모를 사태를 미리 대비한 것이 예산초과를 불러왔다. 하지만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고 했던가. 무사안일에 두고 있던 마음의 무게추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되면 말지 뭐.’
‘안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되지’
‘안 되면 어때?’
이런 마음이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했고, 어느 때보다 그 소리가 잘 들렸던 탓에 평소처럼 무시하지 못하고 한 두 번씩 그 뜻에 따라줬다. 나도 몰랐던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나저나 나 왜 아직도 공항이냐고. MRT 언제 탈 수 있는 거냐고! 하하하.)